매일신문

'섬유의 날' 대구경북 유일 대통령상 기풍섬유 김진도 대표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내외가 바지를 훌훌 털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순간을 놓칠세라 김진도(61) ㈜기풍섬유 대표는 정 회장 내외가 있었던 자리를 한달음에 꿰찼다. "정 회장 자리에 앉으면 꼭 그의 정기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김 대표는 한참이나 정 회장의 체취가 묻어 있는 자리에 앉아있었다고 했다.

20여 년 전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아 머리를 식힐 겸 설악산을 찾았다가 겪은 에피소드다. 섬유 하나만을 생각했고 섬유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김 대표의 열정 때문이었을까? 그의 눈에 환영으로 되살아난 정 회장은 많은 용기를 북돋워주었다고 했다.

김 대표는 11일 '제24회 섬유의 날'을 맞아 대구경북에서 유일하게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최근 몇 년간 '섬유도시 대구'를 외면했던 상이다. 업계 관계자는 "그만큼 추락하는 대구경북 섬유의 위상을 반영하는 듯했다"며 "지역 섬유는 대부분 염색, 원단 등 최종 섬유 제품이 없기 때문에 장관상도 받기 힘들었다. 대통령상을 거머쥔 것은 큰 수확"이라고 했다.

김 대표와 섬유의 질긴 인연은 30여 년 전으로 올라간다. 그는 "섬유를 만난 자체가 행운이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군 전역 후 지역 대표 섬유 업체에 입사해 6개월 만에 120대의 견직기, 80여 명의 직원들을 관리·감독하는 공장장을 맡았다. 성실이 가장 큰 무기였다. 김 대표는 "섬유 일이 너무 신나 하루에 3시간 자고 일했다"며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웠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후 1977년 3월 31일, 기풍섬유를 열었다. 사업에 풍년이 들라는 뜻에서 '기풍'으로 회사명을 지었다. 그러나 김 대표의 순항은 이내 높은 파도를 만났다. 공장을 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기업에서 받던 하청이 뚝 끊겼던 것. "지나가던 지게꾼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좌절하지 않았다. 3년간 죽을 힘을 다해 거래처를 뛰어다니며 시장을 누볐다. 처음 입사한 때를 떠올리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했고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도장을 찾아 단련한 유도가 힘이 됐다. 유도는 한평생 다다미에서 밀고 당기고 넘어지고 넘어뜨리며 터득한 마음의 중심이었고 사업 노하우였다. 실제로 유도에서 나온 경영철학은 고비 때마다 빛을 발휘했다.

IMF, 국제 금융위기 등 힘든 시기에는 오히려 공격적인 투자로 파도를 헤쳤다. 지난 10년간 남들은 하나 둘 섬유를 버릴 때 설비투자를 늘려나갔다. 2000년부터 일제 에어제트 룸 등 72대의 기계를 도입하고 레피어 직기 13대를 추가 설치하는 등 80억원대의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김 대표는 "남들이 'NO'할 때 전 'YES'를 외쳤고 그게 적중했다"며 "유도의 겨루기처럼 끈기와 인내를 갖고 섬유를 움켜쥐었다"고 말했다.

이런 김 대표와 유도의 인연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된다. "미국을 꼭 한번 가보고 싶었어요. 당시 미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는데 유명인이 되거나 유도 사범이 되면 갈 수 있었어요." 미국땅을 밟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유도와 연을 맺었고 이후 평생 섬유와 함께 유도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사)대한유도회 부회장을 14년째 역임하고 있는 그는 현재 공인 8단, 내년에는 입신의 경지를 노릴 실력이다. "돌이켜 보면 입사 초년병 때 성실함과 어려울 때 포기하지 않는 것을 모두 유도에서 배운 것 같아요."

김 대표는 섬유 업계 후배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섬유 산업=사양 산업'이란 인식부터 깨야 합니다. 섬유는 패션과 결합될 때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집니다. 일각만을 볼 뿐 그 아래에는 엄청난 빙산이 있는 것을 모른 채 섬유는 비전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요."

임상준기자 new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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