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구사범학교를 5년 동안 다녔다. 대구사범학교는 1923년 개교하였는데, 개교 당시에는 수업연한 3년인 특과와 1년인 강습과가 있었으며, 초등학교 교원을 양성하는 목적 학교였다. 그 뒤 1928년 5년제인 관립 대구사범학교로 개편되어 특과'강습과'심상과가 있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심상과(제4회, 1932~1937)를 졸업하였다. 학창시절에 검도'사격'교련'나팔'육상에 소질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서 나팔 부는 것과 교련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박정희 학생은 입학시험에서 100명 가운데 51등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1학년 때 석차는 97명 가운데 60등, 2학년 때는 83명 가운데 47등, 3학년 때는 74명 가운데 67등, 4학년 때는 73명 가운데 73등, 5학년 때는 70명 가운데 69등을 했다. 이 같은 성적표는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공개되었는데, 아마도 '꼴찌 출신 대통령'이라는 구설을 차단하기 위한 보안조치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장기 결석이 많았다. 3학년 때는 41일, 4학년 때는 48일, 5학년 때는 41일이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는데, 기숙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돈이 마련될 때까지 눌러앉았기 때문이다. 그는 성적이 꼴찌권을 맴도는 바람에 한 달에 7원씩 나오는 관비(官費)를 받을 수 없었다. 당시 7원이면 쌀 반가마니 값이었다. 그래서 집에서 부쳐주는 식비를 기다리다가 늦어지면 아마도 눈칫밥을 먹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자존심이 강한 그로서는 학교에 버티고 있는 것보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게 마음이 편했을 터이고, 빨랫감 같은 것은 어머니에게 맡겨놓고, 조선일보 선산지국을 운영하던 형 상희를 찾아가 눌어붙기 일쑤였다. 그런가 하면 고향에 내려온 박정희는 뒷동산에 올라가서 군용 나팔을 불었다. 그것은 가난과 꼴찌, 그리고 일제의 억압에 시달리던 자신의 마음을 달래려는 몸부림이었으리라. 그러다가 돈이 마련되면 학교로 되돌아왔다.
동기생 석광수(국제신문 상무 역임)가 이낙선(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 뒤에 상공부장관 역임) 소령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학창 시절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말이 없고 항상 성난 사람처럼 웃음을 모르고 사색하는 듯한 태도가 인상 깊었다. 동기생 가운데 누구와 친하게 지내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5학년 때 검도를 시작했으므로 크게 기술이 있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권투는 기숙사에서 그저 연습을 했을 정도이지 도장에 나가지는 않았다. 군악대에 들어가서 나팔수가 되었다. 축구도 잘했고, 주로 자신의 심신연마에 노력했다. 성적에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으나 (머리는)우수한 편이었고, 열심히 시험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 당시 대구사범학교는 항일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1학년이 기숙사에 입사하면 선배들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대구고보(지금의 경북고등학교), 대구공립상업학교(지금의 상원고등학교), 대구공립농업학교(지금의 대구자연과학고등학교), 교남학교(지금의 대륜고등학교)와 더불어 비밀 결사조직을 만들어 항일운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발각되어 많은 학생들이 검거되었으나, 위축되지 않고 여러 형태의 비밀 결사조직을 만들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 가운데 '권(拳) 사건'을 비롯하여 '백의단 사건', '다혁당 사건', '반딧불 사건' 등이 특히 유명하다. 그로 해서 많은 학생과 교사와 학부모들이 검거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다녔던 대구사범학교의 본관 건물은 1923년 건립되었고, 강당 건물은 1925년 건립되었다. 본관 건물은 1972년 화재로 벽돌 구조 부분만 남았으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원형대로 복원하여 현재 경북대사범대학부설 중학교 교사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역사적 의미뿐 아니라 건축사적 가치가 높아 국가등록문화재 제5호(2002. 2. 28)로 지정되었다.
그는 대통령으로 있던 시절 동기생들을 가까이 하였다. 그 가운데는 서정귀(호남정유 사장 역임), 조증출(문화방송 사장 역임), 황용주(문화방송 사장 역임), 왕학수(부산일보 사장 역임), 권상하(대통령정무비서관 역임), 김병희(한양대학교 문리대학장 역임) 같은 이들이 있다. 그리고 은사 가운데 김영기 선생을 각별하게 존경했으며, 그의 결혼식 때 신부 육영수를 인도하여 식장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축사를 하였다. 또한 김용하 선생의 아들인 대우그룹의 김우중에 대해서도 많은 배려가 있었다.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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