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 호랑이, 신출귀몰한 평민 의병장.'
100여년 전 영덕을 중심으로 한말 약소민족의 설움을 설욕이나 하듯 전설적인 의병활동으로 일제에 항거한 신돌석 장군. 그는 암울했던 시대, 민중의 우상이자 등불이었다.
신돌석 장군이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던 때는 일본이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한 후 조선을 준식민지 상태로 몰아가며 본격적으로 침탈해가던 시기였다. 장군은 1906년 6월부터 1908년 2월까지 2년8개월 동안 영덕·울진·영양 일대 태백산맥을 오르내리며 적게는 의병 수십 명, 많게는 300, 400명을 지휘하며 일제에 타격을 가했다.
◆출생과 환경
영릉의병장 장산 신돌석(申乭石) 장군은 1878년 11월 3일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속칭 복디미에서 부친 신석주와 모친 분성 김씨 사이의 2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본명은 태호(泰鎬)이다.
영해지방 향리 집안 출신인 그는 어려서부터 항일의식이 남달랐고 애국 애족하는 마음이 매우 강했다. 신돌석 장군은 어렸을 때 양반가 자제들과 함께 한문을 익히는 등 당시 지식인 층에 속했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살림에서 성장했다.
신돌석 장군은 18세이던 1896년 일본 폭력배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해 전국적으로 전개된 의병활동에 참가했다. 그는 이때부터 항일의식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20대 초반 신돌석 장군은 일제의 침탈 행위에 대한 울분으로 전국을 떠돌아다녔고 그때 훗날 대한광복회 대표가 되는 울산 송정에 살던 박상진(1884∼1921) 장군과 의형제로 지냈다. 또 손병희·민긍호·이강년 등과도 교류를 가졌고, 경주 최부자 집에도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돌석 장군의 집안은 독립군 일가로 평가된다.
큰 매형인 박수찬은 신돌석 장군이 이끄는 영릉의진에 참가했다 체포되었고, 부인 한재여의 오빠 한용수는 영릉의진 의병으로 활동하다 청송지구 전투에서 순절했다. 아버지 신석주는 아들이 의병장으로 나서자 많은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의병 활동
신돌석 장군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조국의 운명이 위급해지자 무력으로 적과 싸울 것을 결심한다.
다른 지역 의병장들과 정보를 교환하는 등 사전 정지작업 끝에 드디어 1906년 4월 6일 그의 집에서 100m 떨어진 주점에서 최소 100여 명 이상(당시 황성신문 보도) 규모의 의병을 일으킨다. 그는 의병의 이름을 영릉(寧陵)이라고 짓고 스스로 영릉의병장이 되었다.
그후 동해안 및 태백산맥을 거점으로 해 신출귀몰한 활약을 벌이며 일본군 등에게 수십 차례 큰 피해를 주었다.
신돌석 장군의 주 공격 목표는 영해, 영덕, 영양, 진보, 봉화, 울진, 삼척, 평해 등지의 일본군과 관아, 일본인 집단 거주지, 일본인들의 조선 농수산물 약탈을 위한 선박 등이었다. 일본군 측은 영릉의병의 공격으로 우편취급소, 경찰관서, 일본인 거주지 등이 불에 타 파괴되고 주요 시설물들이 붕괴됐다.
또 영천을 근거지로 한 산남의진과 삼척의진 등과 연합작전을 벌여 일본군에 대항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이나 일본인 돈을 빼앗아 의병활동 자금을 마련했고, 무기인 화승총과 양총은 대부분 관아 무기고를 공격해 마련했다. 탄환은 어업용 그물추에서 납을 빼내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안동 출신으로 만주 독립운동계의 대표적 거두인 석주 이상룡과 퇴계 종가도 신돌석에 많은 자금을 지원했다.
영릉의병의 비밀 주둔지는 묘곡면 대동(현재 영해면 대동)과 영해면 인근의 소동 희암골, 백암온천 동쪽 3km 지점 선미동, 칠보산 인근의 온정곡, 백암산·검마산 정상 아래 깊은 골짜기인 독곡 등지에 마련했다.
일본군은 당시 영양군 석보면으로 피신해 있던 신돌석 장군의 아내 한재여를 찾아내 회유공작을 벌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신돌석 장군은 아내 한재여에게 "어찌 죽지 않고 돌아왔느냐. 하물며 왜놈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는 말이냐"며 호통을 쳤다는 것.
신돌석 장군의 활약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1907년 음력 11월 경기도 양주에서 전국의 의병장들이 모여 13도 창의대진소(倡義大陣所)를 결성할 때 신 장군은 경상도격인 교남창의(嶠南倡義) 대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죽음과 역사적 평가
1908년 8월 중순 이후 영릉의진의 활동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일본군 수비대가 증원되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의병 토벌대가 파견되는 등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또 의병활동에 참여했으나 관청에 신고만 하면 모든 죄를 없애준다는 '의병 귀순자 면죄 조칙'을 공포해 대대적으로 시행했다. 특히 일본헌병 1명 당 조선인 헌병 보조원 2, 3명이 함께 근무하는 '헌병 조선인 보조원 제도' 시행도 의병에게 치명타가 되었다.
1908년 9월 1차 모집에만 4천 명이 채용된 일본 헌병 조선인 보조원들은 특정지역의 지리나 친·인척관계, 의병 활동상을 훤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신돌석 장군은 영릉의진을 자진 해산한 후 만주로 건너가 벌일 새로운 항일 투쟁을 구상하게 된다. 그러던 중 1908년 11월 12일 영덕군 북면 눌곡(현재 지품면 눌곡) 상곡 골짜기에서 일제의 현상금을 탐낸 한 주민에 의해 살해된다. 그때 나이가 30세였다.
유족들은 신돌석 장군 시신을 순국 6일만에 일본 경찰로부터 인도 받아 마을 뒷산 봉우리 근처에 묻었다.
이후 한국 정부는 1962년 신돌석 장군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고, 1971년에는 장군의 묘소를 국립현충원 애국자묘역으로 이장했다.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는 "신돌석 장군은 양반 중심 사회에서 평민 출신 지도자가 탄생했다는 점에서 일제 식민사학을 타파한 것"이라며 "장군은 민족운동에 대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고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영덕·박진홍기자 pjh@msnet.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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