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펼치고 빈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앞뒤로 빽빽하게 볼펜으로 칠한다. 그리고 그 위에 연필로 다시 까맣게 칠한다. 그러면 신문이라는 본래의 물성은 사라지고 종이도, 볼펜도, 연필도 아닌 전혀 다른 물질이 남는다. 연약한 종이는 넝마같이 찢어져, 시커멓게 타버린 재를 연상시킨다.
최병소(67) 화백의 작업실에는 캔버스도, 물감도 없다. 대신 볼펜과 신문, 연필만이 가득하다. 현대미술이 각종 화려하고 독특한 재료의 향연장이 되어가는 동안, 이 작가는 평생을 무채색 화면에서 한 길을 걷고 있다. 애초 '담뱃값 정도의 저렴한 재료비로도 다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추구해왔다.
그는 올해 이인성 미술상을 수상했다. 지인들은 모두들 그를 축하했지만, 평상심을 유지해야 하는 작업이기에 상도 그에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한 달이나 작업을 제대로 못했다"는 푸념에서 그만의 작가 정신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는 그의 작가적 자세를 두고 '작가의 길을 두렵게 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제 작품은 그리는 것도, 칠하는 것도, 만드는 것도 아닌 지우는 작업이에요.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지우는 작업에만 몰두하지요."
그는 1970년대 중반 지우는 작업을 시작해, 지금까지 이 작업에 몰두한다. 중간에 10여 년쯤 다른 작품을 했지만 1990년대 후반 다시 돌아왔다. 25년째. 어느덧 지루함을 즐기게 됐다.
신문 한 면을 다 지우려면 볼펜 20자루와 연필 2자루가 소요된다. 5, 6일에 한 장쯤 지워나간다. 작업실에 수북이 쌓인 빈 볼펜심들과 연필 조각들, 그리고 그의 손에 굳게 박인 굳은살은 그 시간을 대변해준다.
이렇듯 지루한 작업은 작가에게 천형이나 다름없다. "어릴 적 겪은 6·25 전쟁의 충격과 공포가 지금도 끔찍해요. 그때의 고통으로 가슴 통증이 심한데 이상하게도 작품 활동에 몰두하면 그 아픔이 사라지죠." 작가에게 이는 '살기 위한' 작업인 셈이다.
그에게 지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를 지우는 작업"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신문 가운데 특히 '증시'면 지우는 것을 좋아한다. 그 숫자들에 세상의 모든 것이 함축됐기 때문이다. 상처투성이 그의 작품 앞에서 관객들은 숙연해진다. 작가의 모든 시간과 집념, 정신이 모아진 그 물질 앞에, 경의를 표한다.
"이렇게 작업만 하다가 삶이 끝나겠지요. 가끔씩은 색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언젠가 다양한 색으로 물감 작업도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사진·우태욱기자 wo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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