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난 허헌(許憲'1885~1951)은 대한제국의 하급관리로 일하며 공정한 사회를 만들려는 일념으로 법률가의 꿈을 키웠다. 23세에 일본 메이지대학교 법학부에 입학, 1908년 제1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됐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대표적인 항일 변호사로 활약하면서 해박한 법 이론을 통해 많은 독립투사들을 변론, 일본에까지 그 명성을 날렸다. 1926년엔 견문을 넓히려 세계일주 여행을 단행해 장안의 화제가 됐고 잡지 '삼천리'에 세 번에 걸쳐 여행기가 실렸다. 이후 그는 신간회 간부로 항일투쟁에 나서 몇 차례 옥고를 치렀다.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그러했듯 허헌도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해 중도좌파적인 사회주의 성향을 띠게 됐다. 해방 후 1946년 오늘 남조선로동당이 결성되자 여운형에 이어 그는 2대 남로당 위원장을 맡아 박헌영 노선을 지지했다. 혼란했던 해방정국에서 그는 1948년 남북협상차 북조선으로 가 내려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1987년 이후 '자발적 월북자'란 이유로 복권대상서 제외됐고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서훈 대상에서도 빠졌다.
북조선 여성운동가 허정숙의 아버지인 그는 1951년 청천강에 빠져 숨졌다. 정치적 숙청인지 자연적인 사고인지 분명하지 않다.
우문기기자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