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의지 없는 '단호한 응징'

1948년 6월 24일 스탈린이 연합국 점령지인 서베를린으로 접근하는 모든 도로와 철로를 차단하고 전기 공급을 중단하자 당시 독일 군정청장 루시어스 클레이 장군은 무력대응을 주장했다. 냉전을 극도로 혐오했던 그였지만 단호한 대응만이 소련의 기를 꺾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는 "소련처럼 무반동 소총부대와 공병대대로 증가한 경비 연대의 동원"을 허락해 달라고 상부에 요청했다. "군대로 수송단을 베를린까지 호위해야 할 것이다. 적의 공격을 불러온다 하더라도…모든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

워싱턴은 장시간의 회의 끝에 이 요청을 거부했다. 국방장관 제임스 포레스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합동참모본부는 전쟁 발발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베를린에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무장 호송대를 투입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모던타임스Ⅱ'폴 존슨) 이런 판단에 따라 채택된 우회전략이 1948년 6월 26일부터 11개월 동안 지속된 무제한 공수작전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2억 2천400만 달러, 요즘 가치로 31억 달러라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야 했다.

당시 소련은 베를린 주변에 40개 사단을 집결시켜 놓고 있었다. 하지만 연합국 병력은 8개 사단에 불과했다. 전쟁이 벌어지면 게임 자체가 안 되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미국의 무제한 공수작전은 비싸게 먹히긴 했지만 합리적인 결정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는 소련의 진정한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뒷날 베를린 봉쇄를 "스탈린이 단순히 총검으로 자본주의 세계를 한번 찔러본 것"이었다고 말했다. 소련은 미국을 살짝 건드려봐서 세게 나오면 꼬리를 내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소련의 군사력이 막강하지만 독일과 죽기살기로 싸운 뒤끝이라 미국과 전면전을 벌일 현실적 능력은 2%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얘기를 꺼낸 것은 북한의 도발에 대한 MB정부의 유약한 대응자제가 베를린 봉쇄 당시 미국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정부는 입만 열면 '단호한 응징'을 되뇌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겨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영토 피격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해서는 한 발 더 나갔다. 국군통수권자의 입에서 나온 첫 명령이라는 게 '확전 금지'였다. 초장부터 군의 손발을 묶은 것이다. 이를 전면전은 막아야 한다는 고뇌의 발로라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야 할까. 그 뒤 명령은 시간이 지나면서 '단호한 대응' '몇 배 응징'으로 엎치락뒤치락했다. 이러니 군으로서는 대통령의 의중이 '확전 방지'인지 '단호한 대응'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대응 공격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당장 결정을 내려야 할 군에게 명령의 행간을 읽도록 만든 것이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고위관계자만 참석한 화상회의 내용이 잘못 전달됐다며 오히려 이 대통령이 '상황에 따라 북한 미사일기지도 타격하라"고 지시했다고 해명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물론 '단호한 대응'만이 사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상황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이끌려면 때에 따라 물론 '유연한 대응'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관성으로 굳어진다면 문제다. 상대가 총검으로 살짝 찌르기만 해도 지레 겁을 집어먹고 유화책에만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피격으로 드러난 이명박 정부의 뢴트겐 사진이다. 전 정권의 '햇볕'과는 다른 것을 기대했던 국민으로서는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다.

전쟁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전쟁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는 로마의 군사전략가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의 말처럼 오히려 전쟁도 불사한다는 결의가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불행하지만 현 상황에서 전쟁을 피하면서 북한을 응징할 수단은 없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꼭 전쟁을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전쟁도 불사한다는 의지가 없이는 북한의 습관성 도발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이번에도 말로만 해결하려 드는지 국민은 지켜볼 것이다.

鄭敬勳(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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