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쌓인 거리며 바람이 불 때면 온통 흩날리는 나뭇잎들. 단풍이 아름다운 거리를 차를 타고 달리면 기분이 좋다. 이럴 때면 한 편의 시를 읽고 싶어진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며 프루스트, 플로베르, 엘뤼아르, 하이네 같은 외국 시인들의 시도 좋고,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도 좋다.
이성복 시인의 '남해 금산'이라는 시를 처음 읽은 건 누군가가 도서관에 기증한,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된 시집에서였다. 어떤 문학청년이 열심히 읽으며 줄을 치거나 메모까지 한 시들. 그런 시집 속에서 만난 이성복 시인의 시는 시인과 나보다 앞서 그 책을 읽은 독자와 내가 함께 만나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준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이성복, '남해 금산')
이 시가 서정인의 소설을 모티브로 쓰여졌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고 그 소설을 찾아보기도 했다. 이런 시는 읽는 이에게 여러 가지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남해 금산에 여러 차례 간 것도 이 시 덕분이다. 금산에 올라 다도해의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이 시를 나직이 읊어보곤 했다.
오규원의 '한 잎의 여자'를 읽고도 한참 즐거웠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같은 슬픈 여자.' 이런 시가 왜 좋은지 나는 이성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너무 일찍 떠나서 더 애틋한 기형도의 '빈집'은 어떤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엷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이 시를 읽으면, 무척이나 외로웠을 것 같은 젊은 시인의 내면이 그려진다. 얼마 전 같은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한 걸 보면 이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가 보다.
틈나면 아이들에게 시를 읽어주고, 도서관에서 시인을 불러 '시와 함께하는 밤' 같은 행사를 열기도 한다. 시만 읽으면 너무 고요하니까 오카리나나 클래식 기타 연주회 같은 작은 음악회를 곁들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시를 무척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기회가 별로 없어서 즐기지 못했을 따름이다.
불후의 명작 '레미제라블'의 작가이자 낭만파 시인인 빅토르 위고 탄신 200주년을 맞아 프랑스의 모든 학교가 첫 시간을 빅토르 위고의 시를 읽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나라처럼 우리도 시를 즐기고 사랑하는 문화를 만들어나가면 좋겠다. 그래야 시인들도 즐거이 시를 쓰고 시로 밥도 먹고 독자들도 즐겁지 않겠는가.
민음사에서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라는 제목으로 한국 대표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을 골라 두 권으로 묶어 놓았다. 예쁜 삽화도 있고(시집에서 삽화는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끝별과 문태준의 해설도 붙어있다. 책장에 꽂아두고 생각날 때마다 펼쳐보기에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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