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의 역사·문화 인물] ⑨정기룡 장군

임진왜란 7년 전투서 60전 60승…"바다엔 이순신, 땅에선 정기룡"

정기룡 장군 초상화
정기룡 장군 초상화

상주는 국내 대표적인 '슬로시티'(Slow City)이다. 이 고장의 대명사인 '삼백'(三白)을 나타내는 곶감과 쌀, 명주 모두 '슬로'를 통해 만들어진다. 여기에다 두 바퀴로 달리는 자전거, 땅을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 100년 전통의 은자골탁배기(막걸리)도 '슬로'와 무관치 않다.

경상북도 제일의 곡창지대로 사람들의 마음이 넉넉한 농촌 도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상주를 '1등 상주'라고 칭하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상주는 여러 부문에서 1등을 했거나 하고 있다. 특히 상주를 빼고는 우리나라 육군사(陸軍史)를 말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육군에서는 최근 들어 상주를 주시하며 보배롭게 여기고 있다. 상주가 '호국의 도시'로 떠오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난달 8일 상주에서 열린 '6·25전쟁 60주년 화령장전투 승리행사'만 봐도 우리나라 육군이 얼마나 상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육군의 별이 50여 개나 떴고, 행사에 동원된 화력만도 돈으로 치면 수십억원에 이를 정도였다. 상주 화령장전투가 6·25전쟁 중 우리 군의 최초 전승이었기 때문이다. 군의 승리에는 지역민들의 인민군 관련 정보 제공과 대군지원이 큰 몫을 했다. 그래서 군은 상주시민들의 애국·호국정신을 고맙게 생각하며, 그 뜻을 담은 행사를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현지에서 성대히 마련한 것이다.

이처럼 상주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애국·호국정신은 임진왜란 때 상주를 주무대로 경남지역까지 아우르며 크게 활약한 정기룡(鄭起龍) 장군의 지략(智略)·담략(膽略)·무용(武勇)과 무관치 않다. 정기룡 장군은 1592년에서 1598년에 걸친 7년간의 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 적은 군대를 이끌고도 왜군과 싸워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상승장군'(常勝將軍)이다. 임진왜란 때 해전(海戰)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있었다면 육전에는 바로 충의공(忠毅公·시호) 정기룡 장군이 있었던 것이다.

◆평생 나라 지킨 무관

'전쟁 영웅' 정기룡 장군은 1562(명종17)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18세 되던 1580년 향시에 합격한 뒤 20세 때 상주로 온 것으로 알려졌다. 24세 되던 1586년 무과에 급제한 이래 61세(1622년)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줄곧 상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상주를 발판으로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진영을 옮겨다닌 기록이 남아 있다.

곤양 정씨(昆陽鄭氏)로 당초 이름이 무수(茂壽)였지만 무과 급제 후 왕명에 따라 기룡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의 일대기는 1590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립(申砬)의 휘하에 들어가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로 활동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별장으로 승진했다. 이때부터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의 휘하에서 방어계책을 세우고 거창싸움에서 왜군 500여 명을 격파한 것은 물론 김산(金山)싸움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하고, 곤양 수성장(守城將)이 돼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다. 이어 유병별장(游兵別將)으로 승진한 뒤 상주목사(김해)의 요청으로 상주판관이 돼 왜군을 물리치고 상주성을 탈환했다. 1593년 전공을 인정받아 회령부사로 승진하고, 이듬해 상주목사가 돼 통정대부에 올랐다.

1598년 명나라 군대의 총병(摠兵)직을 대행, 경상도 방면에 있던 왜군의 소탕작전을 맡아 '용양위부호군', 이듬해 다시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01년 임진왜란이 끝난 뒤 다시 경상도방어사가 돼 왜군의 재침입에 대비했고, 다음 해 김해부사·밀양부사·중도방어사(中道防禦使)를 역임했다. 그 뒤 용양위부호군 겸 오위도총부총관·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겸 울산부사가 되었다.

1610년(광해군2년) '상호군'에 승진하고, 그 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의 직을 맡다가 1622년 통영 진중에서 세상을 떴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상주, 지금의 사벌면 금흔리에 묻혔다. 정 장군의 부모 묘소도 같은 자리에 있다.

◆정유재란에서의 활약

정기룡 장군의 활약상은 정유재란 때 성주 주변에서 두드러졌다. 1597년(선조30년) 8월 왜적이 다시 조선을 침입했을 때 장군은 가족들을 금오산성(金烏山城)에 피란시키고 군사를 이끌고 성주로 내려왔다. 성주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과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및 명나라 장수 모국기(茅國器) 등이 군사회의 중이었다.

이들은 큰 구원군을 얻은 듯 기뻐했고 도체찰사는 정기룡 장군에게 당장 대장의 직책을 주고 선산·성주·고령·합천·초계·의령 등 28관 진병을 맡겼다. 정 장군은 선봉대장의 직책을 받은 뒤 28관 고을의 명마를 휘동(麾動)해 남으로 내려가기 위해 성주성에 들어갔는데, 성주목사 이수일(李守一)은 마음속으로 기쁨을 금하지 못하다 막상 정 장군이 남으로 내려간다고 하자 당황해 급히 성문을 닫아 잠그기까지 했다.

이 목사는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고을로 들어오시기에 이제 성주성은 태산반석과 같다고 기뻐했는데 갑자기 군사를 이끌고 나가시니 우리 성주고을은 어찌 하란 말씀이오?"라며 길을 막아선 것.

이에 정 장군이 "도체찰사와 도원수의 명을 받아 의령·합천으로 내려가 북상하는 왜적을 물리치려고 한다"고 하자, 이 목사는 성문 열기를 거부했다. 정 장군이 마음속으로 난처해하고 있을 때 도체찰사 이원익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다투는 장수 앞에 나타나 성문을 열게 했다고 한다.

정 장군은 군사를 몰아 고령 남쪽 용담내(龍潭川) 건너편에 진을 치고 있던 수만 명의 왜군을 매복전술로 무찌르고, 거짓으로 패하는 체하며 왜장을 유인, 사로잡았다.

고령에서 왜적이 대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령을 중심으로 합천·초계·의령·성주 등 수백 리로 뻗쳐있던 왜적 수만 명은 바람에 흩어지듯 달아나 버리고 성주·고령·합천·의령 등 모든 고을은 평화를 되찾게 됐다.

이 전과로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가 된 정 장군은 성주로 병영을 옮긴 뒤 상주와 성주의 백성들을 편안히 다스리자, 전라도와 충청도의 피란민 수십만 명이 성주와 상주로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1597년 9월, 서울로 올라갔던 가등청정·흑전장정 등 왜군무리가 직산(稷山)에서 우리 군사에게 대패해 남으로 쫓겨 오면서 상주지방에 몰리자, 정 장군은 정예부대 400여 명을 거느리고 지금의 김천 증산면으로 달려 잠복해 있다가 직접 적장의 머리에 화살을 꽂았다.

적장 가등청정은 "추풍령에서 흑전장정을 쫓고 거창에서 모리휘원을 함몰시킨 바로 그 소년장군 정기룡"이라며 놀라 징을 울려 군사들의 행군을 멈추게 했다. 정 장군은 왜적 십만을 이틀 동안이나 꼼짝 못하게 하면서 성주와 상주의 백성들을 말끔히 피란시킨 뒤 밤을 이용해 군사를 움직여 낙동강변 등에서 매복해 울산으로 향하던 허기진 적을 대파했다. 나라에서는 정 장군의 공을 찬양, '절충장군'(折衝將軍)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의 직책을 내렸다.

그런데 그때 정 장군에게 적과 관련한 정보가 들어왔다. 남원에 잔존하고 있는 적병이 진주에 있는 왜적과 서로 연락, 왕래한다는 것이었다. 정 장군은 즉시 합천 야로로 진군해 적 10여 명의 목을 베고, 안음(安陰)을 거쳐 거창으로 들어가 적군 100여 명을 사살하자, 정 장군의 위풍에 놀란 왜적들은 장군이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고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돼 버렸다고 한다. 정 장군의 활약으로 정유재란 때 성주와 상주는 큰 피해 없이 평화로운 고을로 남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정기룡 장군은 하동에서 태어나 상주로 옮겨와 몸소 호국운동을 주도한 '전쟁영웅'으로, 후일 6·25전쟁 때 화령장전투와 낙동강전투 등에서 많은 전쟁영웅들을 낳게 한 정신적 지주가 됐다.

◆선양사업과 호국벨트

정기룡 장군의 뜻을 기리고 그의 정신을 본받자는 시민운동도 최근 들어 가시화하고 있다.

정기룡장군기념사업회가 2008년 창립해 매년 5월 26일 정 장군의 위패를 모신 상주 사벌면 금흔리 325 충의사에서 탄신제를 여는 등 선양사업을 주도해 나가고 있다. 올 5월 탄신제에는 후손들과 육군의 장성들까지 대거 참석해 정 장군이 우리 육군의 '전쟁영웅'이었음을 새삼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

상주시도 정기룡 장군의 무덤, 신도비, 위패와 유물을 모신 충의사(054-537-6066) 등과 화령장 전투를 연계한 '호국벨트' 구축에 나섰다. 청소년들의 호연지기를 기르는 장으로 활용하도록 하는 한편 자전거투어로 전쟁영웅들의 발자취를 직접 돌아보는 프로그램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성백영 상주시장은 "역사를 돌이켜보면 정기룡 장군을 비롯해 상주와 상주사람들이 호국의 중심에 서 있었다"면서 "올곧은 선비정신과 낙동강 젖줄기 주변에서 자라면서 형성된 넉넉하고 정의로운 정신이 나라를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 하도록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상주·황재성기자 jsgold@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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