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고소'고발'무고가 유독 많은 나라다. 아파트 소음문제에서 발단된 이웃 주민과의 언쟁이나 집주인과 세입자의 작은 다툼이 고소'고발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난해 우리나라 국민들의 고소'고발 건수는 61만8천여 건으로, 이웃 일본에 비해 44배, 인구 비례를 감안할 경우 무려 124배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에서 증거불충분으로 기소조차 되지 않은 '묻지마' 고소'고발이 전체의 67%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일본은 고소'고발 건수가 매년 줄어드는 데 반해, 우리나라는 증가 추세다.
법정에서 거짓말을 하는 위증이나, 없는 일을 꾸며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무고(誣告)는 연간 3천715건으로 매년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일본에 비해 절대 건수로 196배, 인구비례로는 490배나 된다. 이러한 고소'고발'무고의 남용은 우리 사회의 후진성을 나타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구경북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지역에서 일어난 고소'고발은 8만 건으로 전국의 13%를 차지해 인구 비중(10.4%)을 웃돌았다. 다른 지역보다 고소'고발이 더 많다는 뜻이다. 대구경북의 위증'무고죄 처벌건수가 전국에서 가장 많았음은 올해 국정감사에서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이처럼 고소'고발'무고 건수가 선진국에 비해 월등히 많은데다 매년 증가일로에 있는 것은 시민들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기보다는 법에 호소하는 경향이 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소통의 '동맥경화'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필자는 고소 사건의 당사자들이 화해에 이르도록 하는 검찰 내의 형사조정위원회에서 수년간 봉사한 적이 있다. 수십년 간 우정을 쌓아온 친구 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친지나 친척, 심지어 피를 함께 나눈 동기(同氣) 간에도 서로 반목하여 법에 호소하러 오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소통 문제의 심각성을 새삼 깨닫곤 했다.
이 같은 소통 부재 현상은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 깊은 불신과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사회갈등지수는 OECD 27개국 중 네 번째였다. OECD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도 소통의 갈증 현상이 빚어낸 사회적 병리현상의 하나라 할 것이다.
프란시스 후쿠야마 교수가 지적했듯이 신뢰는 소중한 사회적 자본이다. 소통의 부재와 갈등으로 인해 사회적 자본인 신뢰의 기반이 허물어지면 개인에겐 고통을 안겨주고, 기업과 국가에게는 시간적, 금전적 비용의 짐을 지우게 된다. 한 연구기관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높은 갈등 수준으로 인해 1인당 GDP의 27%를 비용으로 치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소통의 동맥경화와 사회적 갈등이 지나칠 경우에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패자가 되는 '사회적 함정'에 빠질 우려도 있다.
오늘날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로 불리는 소통을 위한 기술과 수단들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곳곳에 소통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고 신뢰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생겨난 물질만능주의와 가족과 공동체를 중시해온 전통적 가치체계의 붕괴 등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사회 곳곳에 소통의 온기가 되살아나고 신뢰의 싹이 돋아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솔선수범하면서 소통의 물꼬를 트는 데 앞장서야 한다. 지도층 인사들이 정책과 의사 결정 과정을 보다 투명하면서도 이해 관계자들의 참여와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중심형 소통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시민 모두가 소통의 능력을 키우는 일도 중요하다. 성인의 '성'(聖)자는 '귀(耳)와 입(口)을 잘 다스려야 지도자가(王)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소통을 잘 하는 사람일수록 행복해지고, 소통하는 문화를 가진 기업과 사회일수록 경쟁력이 커지게 된다. 남의 말을 좋게 하고 이웃을 배려함으로써 막혔던 소통의 물꼬를 트고 신뢰를 쌓을 때 침체된 지역 경제의 회생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술자리에서 건배사로 '통통통'을 많이 쓴다. 의사소통이 잘 돼야 운수대통하고 만사형통할 수 있다는 뜻에서다. 한 해를 마감하는 송년 모임에서 우리 모두 '통통통'을 외치면서 '소통의 달인'이 되겠다는 다짐을 해보면 어떨까.
하춘수(대구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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