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 붙어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의 물이/ 수심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김남조 시 -겨울바다-
겨울남자는 계절만큼이나 쓸쓸하다. 특히 중년남자의 마음은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바싹 말라 있다. 점점 삶이 무료해지거나 힘들다고 느껴질 때, 중년남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한 것 없이 또 한 해가 흘러갔다는 자괴감이 드는 연말이면 기약 없이 길을 나서고 싶어지는 마음은 더 간절해진다. 이럴 때 문득 떠오르는 곳이 있다. 바로 겨울바다다. 찾는 이 없어 외로울 것 같은 겨울바다는 동병상련의 정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껴안아 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겨울바다는 중년남자를 닮았다
따뜻한 봄 햇살 가득 머금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봄바다는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태양이 작열하고 인파로 넘쳐나는 여름바다에서는 젊은이의 열정이 느껴진다. 반면 인적이 드문 겨울바다는 쓸쓸한 자화상을 가진 이 시대의 중년을 닮았다. 특히 겨울바다에 몰아치는 매서운 바람과 거친 파도는 여성보다는 남성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한 해를 보내는 요즘은 매일 뜨고 지는 태양도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이런 계절에는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 겨울바다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이 공존한다. 겨울바다는 한 해를 비워내고 아름답고 치열했던 지난 시간을 되새기는 자성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철 지난 바닷가에 서면 온전히 자신을 마주 대할 수 있다. 남에게 털어놓으면서 고민을 해소하는 여자와 달리 외롭고 힘이 들면 혼자만의 공간으로 들어가 자신만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남성에게 겨울바다는 조용히 상념에 잠길 수 있는 안성맞춤의 장소다. 남자도 가끔 몸서리나게 바다가 보고 싶어지는 이유다. 자신을 닮은 겨울바다에서 세상의 소금기에 겉절은 일상을 내려놓으며 남자의 삶은 한결 부드러워진다.
◆겨울바다 단상
경인년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기에 겨울바다를 찾았다. 지난달 29일 오전 포항 북부해수욕장에는 일찌감치 겨울이 당도해 있었다. 날씨는 포근했지만 바다를 건너온 바람 끝은 매웠고 하늘과 맞닿은 바다는 시린 겨울처럼 청명했다. 월요일이라 바닷가는 유난히 한적했다. 주말 나들이객들의 발길마저 뚝 끊어진 곳에는 바람과 파도만이 넘실대고 있었다. 숨이 막힐 듯한 적막에 파도마저 소리를 낮추었다. 갈매기도 비행을 접고 삼삼오오 어깨를 맞대며 고요를 즐기고 있었다.
코발트빛 바다 위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포구로 들어오는 작은 어선에 놀라 갈매기가 후드득 날아오른다. 밤새 조업을 마치고 귀향하는 배를 가로지르며 날아오르는 갈매기의 모습에서 비상의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포구에서는 조업을 마친 어부들이 부지런히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저 멀리선 북부해수욕장의 명물인 바다분수가 하늘 높이 물을 쏘아 올리고 있다. 120m 높이까지 물을 밀어 올리는 바다분수가 마치 '삶은 살 가치가 있고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겉으로 보기에 황량하고 쓸쓸해 보이지만 겨울바다에 생명의 기운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반원 모양으로 굽어진 해변을 따라 걷다 백사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계속 되풀이되는 우리의 일상처럼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파도를 보니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상념이 스멀스멀 되살아난다. 짧게는 한 해를 잘 살아왔는지, 길게는 살아온 인생에 대한 갖은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고개를 드니 투명한 하늘과 차가운 공기가 탁한 눈과 가슴을 깨끗하게 씻어준다. 푸른 하늘과 하늘을 닮은 푸른 바다는 끝없이 이어지더니 결국 수평선 끝에서 하나가 됐다. 먼 바다 위 점점이 떠있는 배가 없었더라면 바다와 하늘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없었을 것이다. 푸름으로 가득한 세상을 가로지르는 갈매기의 힘찬 날갯짓에서 세상의 모든 구속을 거부하는 자유 의지가 느껴진다.
곳곳에 여백의 미학이 살아 있는 겨울바다는 저물면서 더 빛이 난다. 고갯길을 넘어선 중년의 인생이 초라하기보다 중후하고 보석처럼 귀하다는 것을 대변해 주듯 겨울바다의 저녁 색깔은 황홀하다. 자판기 커피 한 잔에 의지해 추위를 달래고 짭조름한 바다 냄새에 취하는 겨울바다의 진정한 매력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달력이 달랑 한 장 남은 이 시기 겨울바다는 찾을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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