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행, 경북을 걷다] (49)영양 금강송 생태경영림

박종경 작-숲길에서 어느새 숲은 울긋불긋 옷을 갈아입었고, 산새 한 마리는 마음이 바빠졌다. 자생식물탐방로 숲길에서 만난 새는 소나무를 깎아만든 친구 위에 올라앉아 무언가 열심히 찾고 있다. 숲에 귀를 기울이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말을 쏟아내기에 바빠서 듣지 못할 뿐이다. 지금은 그 많던 단풍도 다 떨어지고 말랐겠지만 올해의 마지막 잔치를 벌이는 숲은 흥겨운 음악소리라도 흘러나오는 양 유쾌하고 즐거웠다. 박종경 화백은
박종경 작-숲길에서 어느새 숲은 울긋불긋 옷을 갈아입었고, 산새 한 마리는 마음이 바빠졌다. 자생식물탐방로 숲길에서 만난 새는 소나무를 깎아만든 친구 위에 올라앉아 무언가 열심히 찾고 있다. 숲에 귀를 기울이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말을 쏟아내기에 바빠서 듣지 못할 뿐이다. 지금은 그 많던 단풍도 다 떨어지고 말랐겠지만 올해의 마지막 잔치를 벌이는 숲은 흥겨운 음악소리라도 흘러나오는 양 유쾌하고 즐거웠다. 박종경 화백은 "숲은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진정한 쉼터"라고 했다.
금강송 = 이곳 숲에는 금강송뿐 아니라 다양한 식생이 자라고 있다.
금강송 = 이곳 숲에는 금강송뿐 아니라 다양한 식생이 자라고 있다.
바위솔 = 바위에 붙어사는 바위솔. 9월에 흰 꽃이 피고 10월에 열매를 익고 나면 죽는다.
바위솔 = 바위에 붙어사는 바위솔. 9월에 흰 꽃이 피고 10월에 열매를 익고 나면 죽는다.
구름다리 = 자생식물탐방로 입구에서 등산로로 이어지는 구름다리. 하천에는 다양한 민물고기가 산다.
구름다리 = 자생식물탐방로 입구에서 등산로로 이어지는 구름다리. 하천에는 다양한 민물고기가 산다.

햇살은 따스했고 바람은 차가웠다. 영양 수비면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을 찾았을 때 가을이 한창이었다. 숲은 지난 일년간 준비한 축제의 절정에 올라있었다. 울긋불긋 축제의 옷으로 갈아입은 나무들은 흥겨움에 취해 마치 소리라도 질러댈 품새였다.

지난겨울 처음 산길을 내디뎠을 때, 숲은 잔뜩 웅크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삭풍이 몰아쳐도 마지못해 가지를 흔들며 '귀찮게 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고, 온 산이 하얗게 덮였을 때도 마치 백일몽을 꾸듯이 잠잠히 침묵 속에 몸을 사렸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햇살이 내려쬐는 시간이 길어지자 숲은 그제서야 아는 체를 했다. 호기심 많은 작은 풀들은 꽃샘추위 무서운 줄 모르고 일찌감치 고개를 내밀었고, 수많은 계절의 변화를 지켜본 아름드리 나무들은 제법 느긋이 새순을 피워냈다.

작열하는 햇볕과 쏟아지는 빗물을 온 몸으로 받으며 숲은 우렁차게 포효했다. 순간만을 즐기며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간들은 도저히 알아챌 수 없지만 하루가 다르고, 한달이 다르게 숲은 몸집을 키웠다. 마치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한 표정으로.

바람 속에 찬기운이 느껴지자 숲은 재빨리 움직였다. 노랗고 붉게 잎새를 물들이며 올 한 해 무럭무럭 키워준 자연에 감사하며 마지막 축제를 준비했다. 그렇다. 그것은 축제였다. 비록 인간을 위한 것은 아니었으되, 함께 즐거워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영양읍에서 북쪽으로 일월면을 지나 31번 국도를 따라가다보면 오른쪽으로 난 88번 국도를 만난다. 동서를 가르는 거대한 산줄기를 넘어 동해로 빠지는 길이다. 영양 수비를 지나 길을 계속 가면 백암온천을 거쳐 울진 온정 땅에 닿는다. 오늘 찾아갈 길은 영양 수비면 본산리와 신원리에 걸쳐있는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이다. 이곳 숲은 다행히 한창 벌목이 심하던 때의 화를 피해 비교적 보존이 잘 됐다. 이때문에 1972년 일찌감치 '미림'(美林)으로 지정됐다. 88번 국도 건너편에는 유명한 검마산 자연휴양림이 자리 잡고 있다.

생태탐방로가 여러 곳에 마련돼 있다. 가볍게 걸어볼 요량이면 '자생식물탐방로'만 걸어도 된다. 지금은 그 아름답던 잎새를 다 떨구고 다시 깊은 잠을 준비하겠지만 가을 끝자락에 찾아갔을 때만 해도 숲은 온통 아름다운 빛깔로 치장을 하고 있었다.

탐방로 입구에는 자그맣게 차려진 '금강소나무 전시관'이 있다. 왜 금강송에 매료되는 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비슷한 크기의 나무지만 금강송은 무려 200년, 일반 소나무는 90년의 수령이었다. 그만큼 금강송의 나이테는 촘촘하고 꽉 들어차 있다.

'생태탐방로'를 오르려면 먼저 작은 개울을 건너야 한다. 누치, 버들치, 은어가 사는 그 개울을 가로지르는 아담한 현수교도 있다. 하지만 이리로 올라가면 가파른 오르막 때문에 꽤 고생해야 한다. 대신 '자생식물탐방로'를 따라 숲 안쪽으로 들어간 뒤 '생태2탐방코스'로 접어드는 편이 조금 수월하다. 이곳 뒷산은 검마산과 마주보는 울련산(938.6m)의 동쪽 줄기쯤 된다. 숲길은 다행히 찾는 이가 많지 않은 덕분에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숨이 가빠오고 이마에 땀이 비칠 때면 잠시 능선이 이어지고, 다시 오르막이 시작된다. 이러기를 서너차례 거듭하면 어느새 저 멀리 검마산이 보이는 정상부에 다다르게 된다. 그 아름다움을 어디에 비할까.

정부인 안동 장씨로 알려진 장계향이 그 유명한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곳이 바로 영양 수비 땅이다. 원래 석보 두들마을에 살았지만 1653년 이곳으로 이사한 뒤 20년간 수비에 살면서 책을 썼다. 장계향의 아들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갈암 이현일이다. 360년 전 수비의 모습을 그가 남긴 '수비계정기'(首比谿亭記)에서 엿볼 수 있다. '수비의 산은 태백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산맥이 뻗어 완만하게 사방을 에워싸고 그 가운데를 들판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물은 가까운 동쪽으로부터 쏟아져 흘러 바위에 부딪히면서 수십리를 가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중략) 기이한 바위들과 함께 짙푸른 초목이 우거져 있으며 깨끗한 물이 맑은 소리를 내면서 흐르고 있어 산의 운치도 있고 볼만한 시내도 있으니, 이를 취해서 진덕(進德)의 방도로 삼는다면 덕이 치우치지 않을 것이요. (중략)'

권영기 수비면장은 "수필가이자 교육자였던 김규련 선생이 남긴 '거룩한 본능'에서도 수비의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이 수필은 국정 교과서에도 실린 바 있다. '동해안 백암 온천에서 눈이 쌓인 주령을 넘어 내륙으로 들어서면, 산수가 빼어난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여기가 겨우내 눈이 내리는, 하늘 아래 첫 고을인 수비면으로, 대구에서 오자면 차편으로 근 다섯 시간을 달려야 하는 곳이다.'

마을로 찾아온 아름다운 황새 한 쌍. 마을 사람들은 길조로 여기지만 낙엽이 질 무렵 어느 날 아침 황새 한 마리가 밀렵꾼이 쏜 총에 맞아 죽고 만다. 그리고 무서리가 몹시 내리던 어느 날 아침 살아남은 황새가 앞서 죽은 짝의 곁에서 목을 감고 싸늘히 죽어있는 모습이 발견된다. 김규련 선생은 수필 속에서 이 본능이 '종교보다 더 거룩하고 예술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고 했다.

수필 속에서 '하늘 아래 첫 고을'이라고 표현했듯이 수비는 해발고도가 높은 곳이다. 울진에서 이 곳으로 오자면 끝이 없어보이는 오르막을 쉼없이 내달아야 한다. 그리고 주령(구주령으로 표기돼 있지만 원래는 구슬 주(珠)를 써서 구슬령이었다)에 올라 한숨 돌린 뒤 수비 땅에 들어서면 내리막은 온데간데 없고 말 그대로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앞서 길을 걸었던 본신·신원리 일대만 해도 평지의 해발고도가 500m에 이른다. 지금은 수필에서처럼 차편으로 다섯 시간을 달려야하는 거리도 아니고, 화전민의 후예가 사는 곳도 아니다. 길이 뚫리고 사람들의 왕래도 잦아졌다. 하지만 영양 땅은 옛 사람들의 글처럼 여전히 아름답고 여운이 남는 곳이다. 풍경을 그리는 화가치고 영양에 한 번 다녀가지 않은 사람이 없다지 않는가. 눈이 내리면 다시 한 번 하늘 아래 첫 동네를 찾아볼 생각이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영양군 공보담당 조중호, 김상수 054)680-6064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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