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사랑] 피부 썩는 병 앓는 혜인이

"5살짜리 아이 온 몸에 감은 붕대 풀어주세요"

피부가 썩어가는 병에 걸린 혜인이(5·여)이는 다섯 살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고통을 받고 있다. 정운철기자woon@msnet.co.kr
피부가 썩어가는 병에 걸린 혜인이(5·여)이는 다섯 살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고통을 받고 있다. 정운철기자woon@msnet.co.kr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는 가렵다며 작은 팔을 허공에 저어댔다. 가려워도 스스로 긁을 수 없다. 피부가 썩어가는 병에 걸린 혜인이(5·여)의 몸은 붕대로 꽁꽁 싸여 있다. 창틈을 비집고 들어온 햇빛에 드러난 혜인이는 그래서 더 애처로웠다. 피부가 죽어 검게 변한 자신의 몸을 인정하기에 다섯 살은 너무 이른 나이였다. '에반스 증후군' '골수 섬유증' 이름도 외우기 힘든 낯선 병 때문에 혜인이는 고통받고 있었다.

◆검게 변해버린 혜인이의 몸

혜인이는 눈치가 빨랐다. 외부인의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기자가 병실에 들어서자 엄마를 부르며 심하게 울부짖었다. 엄마 이윤정(35) 씨는 "의사 선생님이 자기 몸을 소독하러 온 것으로 생각해서 그러는 것"이라며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혜인이가 가장 두려워하는 시간은 오후 4시. 1시간 동안 분홍색 소독약으로 '괴사'(壞死)가 번진 몸을 소독한다. 소독약은 상처를 헤집고 스며든다. 칼로 생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주는 소독은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혜인이는 '에반스 증후군'을 앓고 있다. 의사들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희귀난치병이다.

면역 조절 체계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 외에는 아직까지 원인을 모른다. 왼발은 새까맣게 변해버렸고 배는 살갗이 벗겨져 지방층이 드러나 있다.

혜인이는 돌잔치를 하기 전 병원에 발을 들였다. 2007년 겨울 혜인이의 피부가 점점 하얗게 변하자 찾은 병원에서 '골수 섬유증' 진단을 받았다. 피가 만들어지는 골수가 굳는 병이다. 엄마 윤정 씨는 "에반스 증후군에 비하면 골수 섬유증은 견딜 만한 병"이라고 했다.

그러다 올해 8월 혜인이에게 에반스 증후군이 덮쳤다. 첫째 아들 원호(8)가 "혜인이 몸에 멍이 들었다"고 소리쳤던 그날. 엄마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500원짜리 동전 크기였던 검은 멍은 며칠 뒤 온몸을 뒤덮었다. '괴사'의 시작이었다. 엄마는 갑자기 달려드는 병이 무서웠다. 아토피 한번 앓지 않았던 아이의 피부는 심하게 벗겨졌고 썩어갔다. 그렇게 4개월째. 혜인이는 빛이 없는 병실 침대에 누워 지내고 있다.

◆아이들의 기도

혜인이에게는 세상에 1분 일찍 나온 쌍둥이 오빠 인호가 있다. 쑥쑥 커가는 인호를 볼 때마다 엄마의 가슴은 더욱 시리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혜인이는 오빠보다 뒤처졌다. 인호의 몸무게는 3.7kg, 혜인이는 2.4kg이었다. 어린이집을 다니며 친구를 많이 사귄 인호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지만 제 몸을 지키는 것도 벅찬 혜인이는 감정을 전달하는데 서툴렀다. '엄마'를 외치는 게 고작이었다. 1분 늦었을 뿐인데, 인호와 혜인이의 성장 격차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엄마는 인호도 걱정했다. "저 녀석이 뱃속에서 혜인이 몫을 다 빼앗아 먹어서 그렇다"는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아들에게 들어갈까 걱정이다. 엄마는 "나중에 인호가 그런 자책감에 빠질까봐 동생이 아픈 것은 네 탓이 아니라고 항상 말해준다"고 했다. 엄마는 여동생을 위해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양보하는 인호를 더 품어주기를 원했다.

아픈 여동생을 둔 첫째 원호는 일찍 철이 들었다. 장난감을 사달라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고 싶다고 엄마를 다그치지 않는다. 이제 고작 초등학교 1학년인데 보채는 법보다 참고 견디는 법을 먼저 배웠다.

얼마 전 원호는 혜인이가 소독받는 모습을 본 뒤 울면서 병실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 엄만는 매일밤 고사리만한 손을 동생 인호와 포개 기도한다. '혜인이 빨리 낫게 해주세요.'

◆사진을 찍지 않는 아빠

아빠 조규성(38) 씨도 딸의 손을 잡아주기 위해 매일 오후 병원을 찾는다. 사진사였던 아빠는 신랑, 신부의 웨딩 사진을 찍으며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담는 일을 했지만 카메라를 놓은 지 오래다. 딸의 모습을 사진에 담을수록 가슴이 더 미어졌기 때문이다. 여태 가족사진 한 장 찍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는 혜인이가 나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며 혜인이의 손을 붙잡았다.

이런 아빠의 마음과 달리 언제쯤 가족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피부 이식수술을 받는 데만 6천500만원이 넘는 돈이 들어 아이의 수술을 무작정 미뤄 놓은 상태다. 피부 감염을 우려해 1인실을 쓰고 있는 혜인이 앞으로 청구된 입원비와 비급여 약값도 2천만원이 넘는다. 아빠가 미용가위를 수리해서 버는 80만원과 기초생활수급비 등 정부 보조금 50여만원으로는 수술을 엄두도 못낸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혜인이 가족은 원망은커녕 감사하고 있었다. 12월 7일. 엄마는 이날을 더 깊이 감사했다. 혜인이의 생일을 위해 케이크와 초 5개를 준비했다. 흔들리는 초 앞에서 엄마는 고개를 숙여 기도했다. 가난해서, 아픈 딸이 있어서 남의 아픔을 더 잘 이해할 수 됐다고. 혜인이 덕분에 온 가족이 하나가 될 수 있어 감사하다고.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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