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빈의 술잔'으로 알려진 루빈의 이론은 바탕과 도형의 관계를 술잔 그림을 통해 설명한 디자인 이론이다. 사물을 하나의 독립된 형태로 인식하는 데 있어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배경(바탕)이며 주변과의 관계에 따라 형태의 인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술잔이었다가 두 얼굴의 옆 모습이 되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미 FTA를 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도 루빈의 술잔과 흡사하다. 여야 정치권과 업계, 언론, 전문가들의 평가가 제각각이다. 야당은 "강화도조약 등에 이은 5대 불평등 조약" "간도 쓸개도 다 빼준 굴욕 외교의 결정판" 등 비난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4조 원 넘게 미국에 퍼주고 고작 4천400억 원 받아왔으니 말로 주고 되로 받은 꼴이라는 것이다. 급기야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여야 의원들의 종용에 '획 하나도 바꾸지 않겠다'던 자신의 발언과 결과가 달라져 죄송하다며 사과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번 협상이 국가 이익과 국민 정서에 반했다면 마땅히 정부가 사과해야 한다. 하지만 국회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미 FTA가 시급한 일이라고 부채질한 것은 바로 국회다. 민주당 집권 시절 FTA를 하지 않으면 나라가 결딴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야당으로 자리가 바뀌자 무용론까지 들고 나오는 것은 전형적인 말 바꾸기다. 이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장수가 병졸에게 모든 죗값을 묻는 형국이다.
미국과 손해 보는 장사를 하도록 만든 결정적 약점을 제공한 것은 바로 우리다. 이번에 자동차에서 대폭 양보를 한 것도 미국이 쇠고기를 지렛대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쇠고기가 불가침의 영역이라는 점에 발목이 잡혀 자동차가 허물어진 것이다. 이런 약점이 상대에게 그대로 노출되는 데 앞장선 것이 국회다. "이명박 대통령은 협정을 폐기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2007년 "미국과의 FTA는 경쟁에서 우리가 살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은 한'미 FTA가 망국의 도화선인 양 비난하고 있다.
정치인들이 자기 형편에 따라 말 바꾸기를 밥 먹듯 한다면 국민의 신뢰를 잃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번 협상 결과를 놓고 말 바꾸기로 제 얼굴에 먹칠하기보다 차분히 시장의 반응과 계산을 기다려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가장 민감한 것은 바로 시장이기 때문이다.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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