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객체로 취급받던 일반인들이 문화 주체로 변신하고 있다. 단순히 문화를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해 다양한 아마추어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의 도움 없이 주민 스스로 동네에 도서관을 만들어 지역 독서 문화를 이끌고 오페라나 뮤지컬 관람을 넘어 직접 공연을 펼치는 동호인들이 늘고 있다. 또 직장인 밴드는 아마추어 문화의 대표 주자가 되었고 아마추어 미술동호회는 30여 년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같은 '풀뿌리 문화운동'은 향후 대구 문화가 발전하는 데 커다란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 지역에 거세게 불고 있는 '풀뿌리 문화'를 조명해봤다.
◆주민 자치형 도서관 뜬다
지난해 7월 문을 연 햇빛따라어린이도서관(대구 서구 비산6동)은 지자체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는 주민 자치형 도서관이다. 김순자(42·여) 관장은 "서구문화복지센터에서 만난 20명의 주부들이 동네 주민들이 함께 모이고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으고 지난해 초부터 도서관 만들기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도서관을 짓기 위해 일일호프와 일일찻집, 돼지저금통 분양, 재활용장터 개장 등 다양한 방법으로 기금을 마련했고 6개월의 노력 끝에 후원 등을 합쳐 3천만원을 모아 상가 건물 2층에 어린이도서관을 개관했다.
6천여 권의 도서가 있는 이곳은 도서 활동 외에 동네 마당극이나 인형극 등 다양한 문화 행사도 열리고 있다. 이를 위해 13명의 주부들이 자원봉사로 사서 역할을 하고 있다. 김 관장은 "아이들이 학교 마치고 딱히 놀 데가 없었는데 이곳이 생기고 난 뒤에는 놀이터 삼아 이곳을 자주 찾아 책을 읽고 이야기도 나누고 있다"며 "엄마들 또한 이곳에 자주 들러 친목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250명 정도의 후원자를 모았지만 장소가 120㎡로 협소해 문화 행사를 하기에는 비좁고 도서 구입에도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김 관장은 "앞으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운영비를 최대한 마련, 좀 더 다채로운 문화행사를 여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주부 선미화(45·여·대구시 달서구 월성동) 씨는 1년 전부터 아파트 내 독서클럽 '책마루 동아리'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주일에 1차례 꾸준히 모여 회원들이 선정한 도서에 대해 토론을 하고 독서 전문가를 초빙해 강의도 듣고 있다. 선 씨는 "동아리 활동을 통해 독서 습관을 기르는 것은 물론,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제 아이들 독서 지도나 양로원 방문 등 대외 봉사활동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이 아파트에는 책마루 동아리 외에 역사나 영어 동아리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아파트 내 문화동호회 활성화에는 올해 3월 정식 개관한 '책마루도서관'의 역할이 컸다. 규모가 265㎡로 동네 도서관치고는 꽤 큰 편인 책마루도서관은 창고로 활용되던 기존 도서관 공간을 넓혀 도서관과 열람실, 강의실 등으로 리모델링됐고 이후 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대구시청 주민생활지원계 관계자는 "주민 자치형 도서관 짓기는 매년 꾸준히 늘고 있다"며 "과거에는 관(官) 중심의 독서 문화가 주류를 이루었다면 이제는 주민들 스스로 독서 문화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추세다"고 말했다.
◆오페라·뮤지컬 배우기 바람
주부 이혜경(54) 씨는 가곡 마니아다. 3년 전 주위의 권유로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운영하는 오페라교실을 수료한 것이 인연이 됐다. 이 씨는 "오페라교실을 마치고 뭔가 아쉬웠다. 오페라에 대해 좀 더 공부하고 싶어 가곡교실에 참가했는데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곡교실은 오페라교실을 수료한 이들만 가입할 수 있다. 회원들은 일주일에 1차례 모여 다양한 공연에 대한 정보를 얻고 유행하는 가곡이나 일반 학원에서 배우기 어려운 가곡 등을 배우고 있다. 또 대구오페라축제 프리콘서트 때 공연도 펼치는 등 대외 활동도 하고 있다. 이 씨는 "앞으로 가곡교실 공연을 매년 분기별로 늘릴 예정"이라고 했다.
2004년부터 시작된 오페라교실은 지역의 오페라 마니아들을 늘리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매년 1, 2차례 열리는 이 교실은 60여 명을 모아 2개월 과정으로 1주일에 2차례씩 수업이 진행되는데 오페라 감상법과 아리아 배우기, 연출 특강, 영화 속 오페라, 분장 체험 등 오페라와 관련한 이론과 실기를 다양하게 배울 수 있다. 무료 교실인데다 교육 내용이 알차 경쟁률이 2대 1이 넘는다. 대구오페라축제조직위원회 관계자는 "주부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지만 60, 70대 노년층도 참여하는 등 연령층이 다양하다"고 했다. 대구오페라하우스는 오페라교실 성공에 힘입어 최근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오페라교실도 열었다. 지난 7월 40명을 대상으로 1개월가량 교육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오페라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문화적 소양을 기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직장인 임원희(31·여) 씨는 2년 전 지인들과 함께 'GLEE'라는 대구뮤지컬합창단을 결성했다. 동호인들은 온라인 뮤지컬 관람카페 회원으로 활동하다 합창단 만들기에 의기투합했다. 20명 정도가 모인 이 단체는 관람한 뮤지컬의 노래들을 직접 불러보는 등 뮤지컬 따라하기에 열중하고 있다. 직장인과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이 단체는 매주 금요일 모여 합창 연습을 한다. 대외 공연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임 씨는 "지난해와 올해 두 차례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내 딤프린지에 참가했고 올 4월에는 정기 공연도 가졌다"며 "매년 3차례 정도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확산되는 풀뿌리 문화
아마추어 문화를 언급할 때 직장인 밴드를 빼놓을 수 없다. 국내에 인디 문화가 들어오면서 급속도로 퍼진 직장인 밴드는 이제 아마추어 문화의 '아이콘'으로 여겨지고 있다. 동호회 수나 회원 수도 무척 많다. 회원들에 따르면 지역에서만 최소 50~60개팀이 활동 중이며 회원 수도 5천여 명에 이른다. 더욱이 직장인 밴드나 대학생 밴드가 서로 뭉쳐 교류를 하는 동호회 연합도 존재한다. 직장인 밴드를 운영하고 있는 대구문화예술회관 손정수 음향감독은 "대구가 특히 음악적 토양이 잘 깔려있는 편"이라며 "지역 음악인들이 서울에 진출했다가 다시 대구로 유턴해 일반인들을 모집해 밴드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고 이것이 직장인 밴드 열풍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35년 역사를 가진 대구일요화가회의 회원인 윤영숙(60·여) 씨는 "과거에는 문화 모임이 의사를 중심으로 다소 여유 있는 이들에게 국한됐지만 지금은 다양한 분야에서 일반인들이 문화 생산의 주체로 활동하고 있다. 이를 보면 놀랍기도 하고 격세지감도 느낀다"고 했다. 대구가톨릭대 이득재 교수(대구 민예총 대중문화연구소장)는 "외국의 선진국들을 보면 클럽에서 자기들끼리 즐기면서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보편화돼 있다. 국내에서도 외국처럼 문화 소비와 생산을 함께하는 개념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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