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창석의 뉴스 갈라보기] 물처럼 순환하는 사회

이달 7일에 대구의 달성군에 있는 방천리 쓰레기 매립장이 프랑스 불루넥스트 거래소에서 '탄소배출권리'를 팔았다고 한다. 국내의 지방자치단체로서는 처음 있는 일인 데다 판매 금액이 216만 유로(32억 원)에 달한다니, 참 놀랍다. 방천리 쓰레기 매립장이 조성될 당시에는 반대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이후에도 숱하게 민원이 끓던 곳이었으나 이제 완연히 녹색지대로 변모해서 망외의 상당한 수익까지 창출하게 되었다.

탄소배출권은 1997년에 지구 온난화의 주된 요인인 이산화탄소의 발생을 억제하기 위해 선진 38개국이 채택한 교토의정서(Kyoto protocol)에서 비롯되었다. 각국은 1990년을 기준으로 해서 2012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평균 5%까지 줄이기로 했는데, 이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국가나 기업들은 넉넉히 채운 곳에서 배출 권리를 구매함으로써 간접으로 탄소 감축에 동참하는 것이다. 결국 온실가스 억제를 융통성 있게 실천하기 위한 다국가 간의 이행 제도인 셈이다.

탄소배출권이라는 절묘한 감축 방법은 온실가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최종적으로 아예 폐기물이 사라지는 세상을 소망하는 것이다. 이른바 제로이미션(zero-emission) 사회이다. 글자 그대로 폐기물이 제로인 사회다. 폐기물을 감축하거나 없애는 방법은, 쓰레기가 적게 생기는 상품을 제조하는 것에서부터 어차피 생긴 쓰레기를 재활용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다. 각종 생산과 소비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기는 쓰레기지만 충분히 재활용된다면 쓰레기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된다. 이러한 순환형 생산/소비 구조는 우리 사회가 앞으로 가야 하는 길에 놓인 거의 유일한 이정표임이 자명하다.

이러한 꿈 같은 순환형 구조는 자연(自然)을 모델로 삼고 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자연의 본질적인 속성이 순환이지 않는가. 인간이 땅으로부터 원유를 퍼올리고 광석에서 기계를 만들고, 수많은 상품을 마구 소비하면서 지구를 황폐시켜왔지만, 지구라는 거대한 자연은 처음부터 대하처럼 유유히 흘러왔다. 자연은 죽지 않는다. 자연이 스스로 소멸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순환형 구조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 놀랄 만한 순환의 기적을, 자기 소멸의 길로 가파르게 달리고 있던 현대인이 목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빈틈없이 정교한 순환구조를 지닌 자연 현상에서 세계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찾았다. 서양 철학의 시발점이 되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자연 현상에서 우주의 기원과 인간의 본질을 탐색했다. 최초의 철학자인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로 여겼다. 그가 물을 근원이라고 본 이유는 두 가지다. 물은 모든 생물들이 생존하기 위한 불가결한 조건이라는 점이 하나고,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게 두 번째 이유다. 말하자면 비가 내리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고,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다시 비가 되는 끊임없이 흘러다니는 물의 순환운동에서 만물의 근원을 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탈레스는 "지구가 물 위에 떠 있다"고 했다는데, 이 역시 물이 지구의 본질임을 상징하는 시적 언어로 들린다.

바야흐로 순환의 시대다. 산업의 생산에서 소비에까지 자기 모순을 일으키는 일방향형이 아니라 서로가 맞물리며 되살아나는 순환의 방식이 미래의 생산과 소비 체계를 주도할 수밖에 없다.

물질의 생산과 소비만이 순환의 대상이 아니다. 지식과 감각마저도 순환의 영역 속으로 편입되는 게 현대 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예술의 저자는 예술이라고 간파한 작가도 있거니와, 최근의 학문은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통섭(通涉)하는 풍경을 보여준다. 스포츠에서도 바둑에서도 감각은 절묘하게 순환된다. 종당으로 치닫는 지면에서 내가 알고 있는 감각이 순환하는 예를 다 기록할 수가 없어 아쉽다.

근자에 가까운 이가 헌책방을 열었다고 한다. 나는 지식과 감각이 물처럼 순환하는 장면을 떠올리다가 언뜻 헌책방에 전화를 건다. 내일쯤 가보겠노라고, 가서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헌책을 뒤적이는 즐거움을 누려보겠노라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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