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현재 논술을 시행하고 있는 45개 대학과의 협의를 통해 논술고사를 단계적으로 축소하는 방안을 검토해 보겠다고 밝혔다. 최근 논술 고액과외가 심각한 상황이라는 현상과 결부된 대응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교육 현장에선 찬반 논란이 비등했다. 이와 관련해 논술을 담당하는 교사로서의 심정을 조심스레 털어놓고자 한다.
대한민국 사교육은 이미 주식에 상장을 한 기업으로 자라났다. 만약 논술고사를 폐지한다면 그것을 대신하는 전형방식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면 그 전형을 대비하는 사교육이 나타날 것이다. 최근 대학입학사정관제를 대비하는 사교육이 이미 호황을 누린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러면 또 그것도 폐지할 것인가? 단지 사교육을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논술고사를 폐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실, 사교육이든, 공교육이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진정한 투자라면 그것을 아까워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대한민국 사교육이 지닌 교육방식의 심각함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교육은 아이들의 시험과 관련되어 있다. 시험 점수를 잘 받으면 현행 입시에서는 분명 좋은 기회를 보장받는다. 개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사교육은 분명 합리적인 선택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하고 싶지 않은데 남들이 죄다 하니 안 할 수가 없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른바 '붉은 여왕 효과'이다. 아무리 달려도 주변 환경이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제자리에 머물기 위해서라도 죽을 힘을 다해 뛰어야 하며, 더 높은 곳을 가기 위해서는 두 배는 빨리 뛰어야 한다는 것이 '붉은 여왕 효과'이다.
최근 발표된 'OECD 학업성취도 국제 비교'라는 논문은 "우리나라 학생들은 높은 성취에도 불구하고 읽기나 수학에 대한 흥미, 자아 개념, 자아 효능감 등이 낮다. 수학에 대한 불안감은 높았으며 학습 전략은 많이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흥미는 교과의 성취도뿐 아니라 미래 직업이나 학과 선택 등에도 영향을 미치며 자기주도적 학습능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은 미래사회를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라고 했다.
사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은 바로 이 지점이다. 사교육은 아이들의 자기주도적 학습을 방해한다. 사교육 자체가 아니라 교육방식의 문제가 그 본질이다. 현대사회의 지식이라는 것은 내 머리에 암기되는 순간 죽은 지식이 된다. 미래사회의 인재는 비전을 가지고 스스로 지식을 창조하는 인간이다. 미래사회는 창의성이 뛰어난 아이들이 경쟁력을 지닌다. 대부분의 사교육은 그러한 아이들을 키우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
사교육 철폐를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최소한 아이들의 미래와 결부해 옳은 방향의 사교육을 하자는 것이다. 논술이 사교육을 조장하기 때문에 폐지하자는 주장을 할 것이 아니라, 논술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교육방법인지에 대한 판단이 우선돼야 한다. 사교육 때문에 논술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공교육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언제까지 사교육에 끌려가는 정책만을 펼칠 것인가?
논술을 담당하는 공교육의 교사들은 힘들다. 사교육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 교육적인 확신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1년 정도면 대부분 지친다. 솔직히 논술보다는 수능 언어 영역을 가르치는 시간이 훨씬 편하다. 이런 틈새를 메워주는 것이 정책의 역할이다. 논술을 멀리하는 학교 현장도 문제지만, 논술을 담당하는 교사들에 대한 정책적인 차원의 배려도 반드시 필요하다.
미래는 '도둑처럼' 몰래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미 와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고난도의 논술이 아닌 예비고사와 학력고사 점수로만 대학에 들어갔어도 대한민국을 민주주의와 IT강국으로 만들었다고 하면서 논술 폐지를 주장한다. 그들은 아직도 1970년대 산업사회를 사는 사람들이다. 미래는 '도둑처럼' 몰래 다가와서 우리들의 희망을 훔쳐갈지도 모른다.
한준희(대구통합교과논술지원단·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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