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불편한 동거

춘추시대, 월나라 왕 구천(句踐)은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켜 오나라 왕 부차(夫差)의 인질이 된다. 노예와 다름없는 인질 생활에 자존심을 짓밟힌 구천은 구차한 삶을 마감하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당시 최고의 책사(策士) 범려가 있었다. 범려는 월나라의 종묘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구천을 설득한다. 마음을 굽힌 구천은 철저하게 노예 생활을 한다. 그리고 말린 쓸개를 곁에 두고 이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한다.

마침내 구천은 풀려나고 고국에 돌아온 구천은 군사를 일으켜 다시 오나라를 침략, 철저한 복수를 가한 뒤 부차를 죽음에 이르도록 한다. 이것이 '와신상담'의 줄거리다. 그런데 정작 얘기의 하이라이트는 범려의 처신. 십수년간 왕과 함께 인질 생활을 하면서 그를 지켜낸 범려지만 구천이 다시 패왕이 되자 논공행상을 바라기는커녕 홀연히 그의 곁을 떠난다. '어려움을 함께 나눌 수는 있어도 즐거움을 함께 나눌 인물은 아니다'는 것이 범려의 생각이었다.

사람은 어려울 때일수록 결속력이 강해지는 법이다. 그러나 즐거울 때에 이를 같이 나누지 못한다면 이는 진정한 벗이 아니다. 그래서 변함없는 친구는 어려움(苦)이든 즐거움(樂)이든 같이 한다고 해서 동고동락이라고 했다.

1991년 설립돼 근 20년간 지역 개발 과제를 발굴해온 대구경북연구원이 대구와 경북으로 쪼개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린다. 다른 시도는 연구원이 제각각인데 유독 대구경북은 통합 체제로 출발했다. 그만큼 대구경북은 유대가 강하다는 의미였다. 요즘 정부에서 강조하는 '상생'과 '동반 성장'을 훨씬 앞서 실천한 셈이다. 그런데 엊그제 경북도의회가 지원 금액 전액을 삭감, 당장 내년 운영에 비상이 걸렸다.

의회를 나무라자는 것이 아니다. 이런 초강수가 나올 때까지 '가려운 곳'을 덮어둔 지역의 현실이 답답하다. 낙동강 개발 사업, 밀양 신공항 유치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을 코앞에 두고 연구원이 분열된다면 스스로 소금을 뿌리는 일이 아닌가. 대구경북의 '불편한 동거'를 보면서 어려움을 같이하기는 쉽지만 즐거움까지 같이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윤주태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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