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운문서 화악까지] <52-끝> 겨울, 산을 떠나며

우리 산줄기와 그 속에 배인 생활사, 더 늦기전에 복원을…

사진 = 쌍봉같이 솟아 보이는 화악산과 청도 남산. 왼쪽이 남산, 오른쪽이 화악산이다. 비슬기맥의 팔조령 서쪽 봉화산서 본 풍경이다.
사진 = 쌍봉같이 솟아 보이는 화악산과 청도 남산. 왼쪽이 남산, 오른쪽이 화악산이다. 비슬기맥의 팔조령 서쪽 봉화산서 본 풍경이다.

서둘러 창녕지맥·밀양지맥부터 살피긴 했으나, 천왕산 이후의 비슬기맥(화악분맥) 마지막 구간 자체에도 몇 군데 주의해 살펴 둘 지형이 있다. 출발점인 천왕산부터가 그렇다.

천왕산의 가장 큰 특징은 독보적으로 솟는 지형이 없다는 점이다. 해발 600m 전후의 펑퍼짐하고 넓적한 산덩이가 1㎞나 되게 이어갈 뿐이다. 그나마 몇m 차이지게 솟는 정점조차 주능선 위에 있지 않고 청도군 땅으로 넘어 가 있다. 그래서 화악분맥은 천왕산 정점을 빼먹은 채 배고개(305m)~천왕산분기점(596m)~배바위능선~건티재(400m) 순으로 흐른다.

그 중 '배바위능선'은 해발 600m 높이의 저 평평한 구간을 뭉뚱그려 가리킨 말이다. 평원 같아서 옛날 진달래 필 무렵이면 창녕·청도·밀양의 젊은이들이 거기 올라 꽃놀이를 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배바위'는 거기서 가장 높고 특징적인 608m 높이의 암괴다. 하지만 배바위는 산에 올라야만 볼 수 있다. 높이 차가 거의 안 나는 지형이어서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두드러지지 못하는 결과다.

저런 모습을 하다 보니 천왕산은 주는 인상이 강렬하지 못하다. 청도군 쪽에서는 그나마 여러 지릉들에 의해 변화라도 생겨 보이지만 밀양 쪽으로는 그렇지도 못하다. 배바위능선 남쪽에 자리한 밀양 청도면의 소태리·두곡리 마을서 최고봉인 양 솟아 보이는 것이래야 기껏 배바위능선 종점의 해발 607m구릉이다. 그게 남쪽으로 큰 지릉을 분기시키면서 운문분맥과의 사이로 스스로 두드러지는 게 원인이다. 능선 위에선 생각 못할 일이다.

그 결과 현지에서는 607m구릉이 '배바위산'이라는 별개의 산 이름으로 지칭되고 있었다. 실제로는 천왕산과 하나여서 분리하기 전혀 불가능한 덩어리인데도 그랬다. 국가기본도 또한 생각 없이 저 현상을 그대로 반영해 답사객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이게 첫 번째 주목할 사안이다.

두 번째 눈여겨볼 대목은 천왕산~화악산 구간 10여㎞ 산줄기에 의해 나뉘어 있는 청도 각남면과 밀양 청도면 사이에 두 개의 고갯길이 나 있는 점이다. 그건 그 중간에 '범바위산'(611m·호암산)이 솟아 '죽바위산'(422m)으로 이어지는 큰 산덩이로 발달하면서 청도면 상부를 소태리 공간과 요고리 공간으로 갈라놓기 때문이다. 비슷한 원인으로 북쪽 청도 땅도 옥산리 공간과 함박리 공간으로 나뉜다. 그 결과 옥산리~건티재~소태리, 함박리~요진재~요고리의 두 코스 옛길이 형성됐던 것이다.

둘 중에서 행인이 더 많던 중심도로는 요진재 길이었다고 했다. 건티재는 밀양의 북서쪽으로 치우쳐 있으나 요진재는 인구 집중지역과 직결돼 있어서였을 것이다. 재 바로 남쪽에 많은 마을이 모여 있을 뿐 아니라 직선으로 흐르는 청도천의 꼭짓점에 해당해 밀양 무안면·초동면·하남읍 등과 최단거리로 연결되는 것이다. 행인이 많다 보니 요진재 북쪽의 청도 각남면 상함박리에는 주막이 성업해 지금껏 '주막걸'이라는 지명이 남아있을 정도라 했다.

상함박리 마을에서는 골이 아니라 저 주막걸 위 산줄기를 바로 타고 오르도록 옛길이 연결돼 있었다고 했다. 현재 경운기 길로 확장돼 있는 그 코스를 따라 오르다가 임도(녹명리~사리) 노선에 합류해 요진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 옛길을 걸어 오르는 데는 35분가량 걸렸다.

청도 쪽 어른들은 저 재를 넘어 무안·하남까지 다니며 양식을 구했었다고 했다. 청도면·무안면 등 밀양 쪽에서는 풍각장에 다니느라 저 재를 숱하게 넘었다고 했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밀양 청도면이 청도군 소속이었으니 양측의 동질감은 더 컸을지도 모른다.

이 요진재의 위치가 잘못 가리켜지고 있는 점 또한 환기해 둘 사안이다. 국가기본도는 범바위산 동쪽 413m잘록이를 요진재라 표시하고 있다. 임도가 연결되고 평평하게 닦여 있어 정말 유서 깊은 재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 곳이다. 그러나 현지 어르신들은 거기서 동쪽으로 15분 정도(800여m) 더 간 곳이 진짜 요진재 자리라 했다. 445m봉을 넘어 도달하는 405m잘록이가 그것이다. 녹명리 임도가 사리를 향해 방향을 바꾸는 지점서 20여m만 오르면 닿을 수 있다. 잡풀에 깊이 묻혀 쉽게 분별이 안 되지만 마침 송전 철탑이 세워져 지표 역할을 해주니 그나마 다행이다.

요진재(405m)를 지나 449m봉을 남사면으로 지나치면 이번엔 421m잘록이에 닿는다. 200여m 될까 말까 하게 떨어져 있는 농장(옛 상지목장) 바로 서편이다. 거기엔 농장서 이어온 사설 임도가 연결돼 있다. 임도는 이후 산줄기를 따라 조금 오르다가 굽어서 농장 상부 구간을 한바퀴 감아 돌면서 이어져 간다.

저 421m잘록이 이후 화악분맥은 화악산 최고점(932m)으로 치솟는다. 중간에 잠깐 522m잘록이로 내려서면서 숨 돌릴 틈을 주는 외엔 줄곧 오름세인 것이다.

최고점에 닿아서는 산줄기가 90도씩 꺾어 남과 북 두 방향으로 갈라져간다. 남으로 가는 건 철마산(鐵馬山·634m)까지 5㎞가량 이어달리면서 남쪽으로 밀양지맥 등을 갈라 보내는 화악분맥 꼬리 부분이다. 니은(ㄴ)자 형의 저 능선 바깥쪽(밀양)은 펑퍼짐한 반면 안쪽(청도읍 평양리·음지리)은 절벽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래서 능선을 걷노라면 그쪽으로 시야가 시원히 트인다.

헬기장 터가 있는 도중의 853m구릉에서는 밀양지맥이 분기하며, 다음 839m봉은 '윗화악산'이라 불리는 반면 그 아래 757m봉은 그냥 '화악산'(현장에는 '아래화악산'으로 표시)이라 불리고 있었다. 예부터 밀양의 진산·주산이라 했다는 화악산이 앞서 본 932m 최고점인지 아니면 이 757m봉인지 다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대목이다. 757m '아래화악산'서는 지릉이 분기해 '말티재'를 거쳐 밀양 시가지 뒤 옥교산으로 맺는다.

화악분맥 꼬리 구간의 꼬리인 철마산은 절벽이 특히 아찔해서 더 상쾌한 봉우리다. 아래화악산서 추락하듯 280여m나 폭락했다가 또 하나의 산덩이(512m봉)까지 거친 뒤 다시 올라서야 해 화악산과 별개 산으로 구분된 듯하다. 이름은 옛날 전쟁 때 쇠로 만든 말을 세웠던 곳이라 해서 붙었다고 전한다.

남으로 달려간 저 화악분맥 꼬리와 달리, 화악산서 북으로 갈라진 산줄기는 밤티재(470m)로 내려앉았다가 청도 남산(870m)으로 마지막 맺는다. 옛 기록에 '화산' 또는 '화악' '화악산'으로 표시돼 있는 산이다. '오산'(鰲山·자라산)이란 명칭도 보이나, 여러 자료를 종합할 때 화산(남산)의 북사면 지릉 위에 있는 308m구릉(화양초교 앞 화강지 남쪽 봉우리)을 별도로 지목한 명칭이 오산으로 판단된다. 화양읍 시가지 북쪽 국도서 보면 남산 전체는 자라 모습을 하고, 308m구릉은 그 머리에 해당한다.

이 청도 남산도 이제 본명을 찾을 때가 됐지 않나 싶다. '남산'이란 이름에 큰 의미가 숨겨져 있는 듯 여기는 사람이 있으나, 사실은 무엇의 남쪽에 있는 산이라고 해서 붙인 일반명사에 불과하다는 게 중론이기 때문이다. 청도의 봉수대 관련 여러 기록에서 '북산'이 그 대칭어로 등장하고, 남봉대(南烽臺)가 용각산 남릉 위(송읍리)로 옮겨진 뒤에는 그게 '남산 봉수'라 소개되는 것 등이 증거다. 현재의 남산에는 '화산' 정도의 이름을 회복시키면 무난하리라는 의견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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