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의 역사·문화 인물] <13> 한강 정구와 동강 김우옹

理學적 퇴계학파·실천 중시 남명학풍 두루 섭렵, 양파 융합 거점 마련

회연서원
회연서원
청천서당
청천서당

충의와 절개의 고장. 조선시대 인재의 보고(寶庫), 태와 생명의 고장, 국내 최대 성관(姓貫) 지역. 이 모든 것이 성주를 일컫는 말이다. 성주 땅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만 해도 모두 28성관(姓貫)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다. 그 만큼 성주에는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는 뜻이다.

성주는 조선시대 통치이념이자 대표 학문인 성리학의 주요 근거지로 으뜸 학자들을 배출한 곳이다. 성주는 지리적으로 경상 좌·우도의 접점에 위치한 탓에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지역적인 특색이 두드러졌다. 경상좌도의 이학적(理學的)인 전통을 앞세운 퇴계학파와 경상우도의 실천과 실용을 중시하는 남명학파의 사상이 공존했는데 그 중심에는 성주를 대표하는 대학자 양강(兩岡)이 있었다. 양강으로 일컫는 동강(東岡) 김우옹과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절친한 사이다. 동강이 한강보다 세 살 위지만 성주향교 교수로 부임한 덕계 오건의 문하에 출입한 이후 퇴계 이황, 남명 조식의 문하에 차례로 출입하는 등 같은 스승을 모신 동문이다. 그러나 각기 삶의 방향이 달라 후대에 그 평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동강은 과거 급제해 벼슬길로 진출, 오래도록 관직생활을 했다. 이 때문에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할 수 있는 기회가 적다 보니 한강과 같이 많은 제자 양성과 저술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한강은 벼슬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했다. 동강의 천거로 나중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대부분 시간을 학문탐구와 후학양성에 노력해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고 다방면에 걸친 저술을 통해 학문적 성과를 이뤘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생애

한강 정구(1543~1620)는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이라 했고, 본관은 청주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이자 판서 정사중(鄭思中)의 아들이다. 7세 때 '논어'와 '대학'을 배워 대의를 통했고, 오건(吳健)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자 그 문하생에 되어 '주역' 등을 배웠다. 1563년(명종 18)에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에게 성리학을 수학했다.

한강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던 중 1573년(선조 6) 동강 김우옹의 추천으로 예빈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여러 지방 수령에 제수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1580년(선조 13)에 비로소 창녕현감으로 부임하면서 관직에 나아가 1584년 동복 현감을 역임하고, 1585년 교정청(校正廳) 교정랑에 임명돼 '경서훈해(經書訓解)'를 교정했다. 1591년 통천 군수를 지내던 중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게 했다. 1594년부터 우승지, 강원도 관찰사, 성천 부사, 충주 목사, 공조 참판 등을 역임했으며, 광해군 즉위년(1608)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낙향했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을 구하기 위해 상소했고 그 후 벼슬을 단념하고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목(文穆)'의 시호가 내렸다.

◆한강의 학문과 저술

한강의 학문은 성리학과 예학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역사·산수·병진(兵陳)·의약(醫藥)·복서(卜筮)·풍수지리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박학했다.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어 '가례집람보주(家禮輯覽補註)'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 '심의제조법(深衣製造法)' '예기상례분류(禮記喪禮分類)' '오복연혁도(五福沿革圖)' '계상제례문답(溪喪祭禮問答)' 등 많은 예서를 편찬했다. 이 같은 저술을 통해 정구는 "예는 가깝고 먼 것을 정하고, 믿고 못 믿음을 결정하고, 같고 다름을 구별하고, 옳고 그름을 밝히는 기준이다"라고 밝혔다. 또 성리학적인 부분에서 한강은 퇴계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아 경전 가운데 특히 '심경(心經)'을 중시했다. 한강은 외출할 때에도 심경을 손에서 떼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읽고, 제자를 가르치는 주된 교재로 사용했다. 그 결과 경사상(敬思想)을 토대로 해 이황의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수정 보완한 그의 탁월한 성리학 부분 대표작인 '심경발휘(心經發揮)'를 편찬했다. 정구는 지방목민관으로 출사하면서 선정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부임한 고을의 읍지편찬에 독보적 경지를 개척하는 업적을 쌓았다. 그는 1580년 창산지(창녕) 편찬을 필두로 동복지(화순), 함주지(함안), 통천지(통천), 임영지(강릉), 관동지(강원도), 충원지(충주, 미완성), 복주지(안동) 등의 8개 읍지를 편찬했다. 이렇게 부임하는 고을마다 읍지 편찬에 관심을 보인 것은 지방통치자가 그 지방의 지리, 풍속, 인물, 역사, 산업 등 그 지방의 사정을 모르고는 백성을 옳게 다스릴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편찬한 많은 읍지는 전란으로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함안의 읍지인 함주지는 16세기에 편찬한 지방읍지로 유일하게 남아있다.

◆후대의 영향

한강 정구는 오건·퇴계·남명의 문하를 차례로 출입하면서 학문을 닦았고, 광해군 초 정인홍과의 절교로 퇴계학파에 편향되었다. 조목(趙穆)·김성일(金誠一)·류성룡(柳成龍) 등 퇴계의 중요 제자들보다 가장 늦게까지 생존해 많은 제자들을 거느릴 수 있었다. 경상좌·우도의 중앙인 성주에 거주해 퇴계·남명 양 학파를 융합하는 새로운 기점을 마련했다. 특히 17세기 전반 성주일대는 한강과 여헌 장현광에 의해 소위 '한려학파(寒旅學派)'가 형성됐고, 이들은 퇴계 이후 뚜렷한 학문적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던 안동권을 대신해 영남의 학문적 분위기를 주도했다. 정구는 서울 출신의 허후(許厚)·허목(許穆) 등을 제자로 둔 것으로 보아 그의 학통은 영남의 장현광과 근기지방의 허목으로 계승되어 갔다. 또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인 퇴계·남명학파를 통합해 성주·안동에서 경주권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서울근교를 기반으로 하는 근기학파를 확립시켜 실학의 연원을 확립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했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의 생애

동강 김우웅(1540~1603)의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포의(直峰布衣)라 했으며, 본관은 의성이다. 삼척부사를 지낸 김희삼(金希參)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한강 정구와 함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인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문하에 출입해 정통 성리학의 맥을 이어받았다. 1552년(명종 7)에 진사가 됐고, 1567년(선조 즉위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지성과 행동을 겸비한 깨어있는 선비들이 주로 임용되던 정자·수찬·전적·부교리·이조 좌랑·부응교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1580년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일본 사신 현소(玄蘇)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여악(女樂)을 폐지토록 건의해 허락을 얻어냈다. 그 후 직제학·대사성·대사간을 지냈다. 외직으로 전라도 관찰사·안동 부사를 역임했으나 1589년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회령에 유배된 후 1592년 사면되어 승문원 제조와 병조참판이 됐다. 1593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동지의금부사로 선조를 호종해 서울로 환도했으며, 그 해 12월 한성부 좌윤에 올랐고, 대사성·이조 참판·예조 참판을 지낸 후 1599년 사직했다. 유교적 정치이념과 문장에 뛰어나 비어기무(備禦機務) 7조, 중흥요무(中興要務) 8조 등의 시무책을 자주 건의했고, 한강 정구와 함께 성주권의 양강(兩岡)으로서 정치적·학문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정(文貞)'의 시호가 내렸다.

◆선비로서의 면모

동강은 34세 때인 1573년(선조 6)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면서 경연에 참석하기 시작해 57세 되던 해까지 20년 이상 수시로 경연에 참석해 선조에게 성군이 되기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요즘의 국립대학의 총장격인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는 등 교육자로서 손색없는 활동을 했다. 수많은 인재를 추천하고 억울한 사람을 구명하기도 했으며, 부수찬으로 입시했을 때, 선조가 학행이 뛰어난 인재를 묻는 선조에게 동향 친구이자 학행이 걸출한 한강 정구를 천거해 출사하게 했다. 1589년 최영경(崔永慶)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무고를 입고 정철의 국문을 받다가 억울하게 옥사한 것을 대사헌으로 있을 때 상소해 그 억울함을 신원(伸寃)하게 했다. 좌의정 윤두수(尹斗壽)와 우의정 유홍이 용렬·무능하고 사리사욕을 탐하며, 정철이 어진 사람을 죄로 얽어 죽인 것을 논박해 벼슬에서 쫓겨나게 했다. 1598년(선조 31년) 류성룡이 영의정으로 무고로 화를 입게 될 것을 알고 죽을 각오로 상소해 그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이 처럼 동강은 남의 억울한 일에는 발 벗고 나서서 해명하는데 앞장섰지만 정작 자신의 일에는 지극히 담담하고 호방(豪放) 했다.

◆역사가로서의 저술

김우옹은 동인(東人)으로서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년)에 연루되어 회령(會寧)으로 유배됐는데 이때 '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36권을 저술했다. 강목은 36권 2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 송태조 원년(960)부터 명태조 원년(1368)까지 408년간의 중국 역사인 주자(朱子)의 '강목(綱目)'에 이어서 그 후기 약사를 편년체(編年體)로 쓴 것으로 대의명분과 정통론을 강조하는 사림의 역사의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남명 조식으로부터 성성자(惺惺子)를 물려받은 김우옹

김우옹은 퇴계와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인 남명의 외손으로서 그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로부터 '성성자'를 물려받았다. 조식은 성성자라는 방울을 옷고름에 매달고, 경의검(敬義劍)이라는 칼을 늘 품에 지니고 다녔는데, 성성자는 '스스로 경계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경의검 안쪽에는 내명자경(內明者敬), 바깥쪽에는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명문(名文)을 새겨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은 경(敬)이고,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義)라고 해 이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남명은 만년에 성성자를 김우옹에게 주면서 "이것의 맑은 소리가 항상 공경하고 경계하도록 깨우침을 줄 것이니 그것에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당부했다. "이것은 옛 사람이 옥을 차던 뜻에 비길 바가 아니다."며 거기에 남다른 특별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강조했는데, 이는 자신의 제자들 가운데 김우옹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의 한 사람으로 판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는 성성자를 통해 김우옹은 스승의 가르침을 세상에 펼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한 것을 알 수 있다.

성주·정창구기자 jungcg@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