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대구의 눈

젊은 시절, 흔히 '첫눈 오는 날 어디에서 만나자'는 낭만적인 약속을 많이 하곤 했다. 약속할 때는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지만 대부분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아니 약속을 어겨서가 아니라 도대체 눈이 내리질 않기 때문이다. 내리던 비가 잠시 싸락눈으로 바뀌면 이것을 첫눈이라고 우기고 억지 약속을 이행했던 적도 있었다. 어릴 적에는 눈이 많이도 왔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대구의 눈은 이렇게 '귀하신 몸'이 되었다.

눈은 순백으로 삼라만상을 덮어준다. 그 순수함에 인간의 마음은 어쩔 줄을 모른다. 그리고 정호승의 시 '첫눈 오는 날 만나자'처럼 설렘을 준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엊그제 그 귀하신 몸이 대구를 방문했다. 그런데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모양이다. 2.6㎝의 눈에 대구가 비틀거렸다. 도시 특성상 작은 언덕이 많은 도심 곳곳에서 접촉 사고가 일어났고, 교통이 통제됐다. 지하철로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출근길 반월당 역사 안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다행히도 이날 낮 기온이 영상을 기록하면서 잔설이 많이 녹아내렸기에 망정이지 얼어붙었으면 겨울 내내 골목길 차량 통행은 단념해야 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눈처럼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진 자연현상도 드물다. 사람을 들뜨게 하고 시심(詩心)을 자극하는 것이 눈이다. 눈이 없었다면 영화 '닥터 지바고'나 '러브 스토리'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무원에게는 이른 새벽부터 염화칼슘을 준비해야 하는 애물단지일 뿐이다. 특히 대구는 눈에 대한 면역력이 약하다. 그만큼 눈과의 접촉이 적었기 때문이다. 기쁨은 내릴 때 잠시뿐, 이내 도시의 재앙으로 전락해 버린다.

앞으로 지구 온난화로 인해 눈이 더 많이 내릴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이제 대구도 눈 피해 대비책을 철저히 세워야 할 때다. 그래야만 눈이 갖고 있는 매력을 한껏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눈이 사고뭉치 다발로만 인식된다면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 설경(雪景)을 낳는 요정의 선물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 또한 대구시민의 몫이다.

윤주태(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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