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이 2011년 팩션(Faction) '대구 옛 도심, 이야기로 살아난다' 기획시리즈를 시작한다. 팩션은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합성어로 역사적 사실에 개연성 있는 상상력을 보태 흥미롭고 가치있는 이야기를 발굴하는 장르다. 이번 기획 시리즈의 대상은 대구 중구의 옛 도심이다. 북성로, 남성로, 향촌동, 포정동, 계산동 일대는 근대 식민지의 역사, 전쟁과 근대화의 역사를 정면으로 관통한 공간인 동시에 역사·문화·예술의 보고다.
이곳의 오래된 건축물들과 공간은 역사, 문화, 예술의 원석이라고 할 수 있다. 100년 안팎의 비교적 짧은 기간이지만 대구 옛 도심은 한국의 근대 역사를 압축해 담고 있는 특별한 공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일신문의 신년 기획 '도심에 스토리를 입힌다' 는 이 도심에 이야기를 불어넣고, 디자인을 입혀 '보석'으로 다듬기 위한 작업이다.
이번 시리즈는 지금까지 매일신문이 진행해온 도심재생 시리즈를 확대, 생산한 결과물이다. 지금까지 매일신문이 대구 중구의 옛 도심에서 발굴한 팩트는 그야말로 '원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발굴한 원석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이야기를 부여하고, 디자인을 입혀 나가려는 것이다.
'대구 옛 도심, 이야기로 살아난다' 시리즈는 단순한 자료 정리나 개괄적인 소개가 아니라,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만듦으로써, 그 자체로 다양한 2차 장르로 발전할 수 있는 소스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팩트가 부족한 부분은 개연성 있는 상상을 동원해 흥미로운 이야기로 완성하겠다는 것이다.
매일신문은 이번 기획을 통해 '스토리 맵'을 만들고, 이 스토리 맵을 바탕으로 영화, 드라마, 뮤지컬, 오페라, 연극 등으로 발전시켜 나가려고 한다. 이 같은 작업을 통해 반목하기 일쑤인 생활과 문화 예술이 상생하는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편집자 주-
대구 계산동 계산성당과 앞밖걸 사이 골목을 뽕나무 골목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지리전략가인 두사충(杜師忠 또는 杜思忠) 장군이 귀화하여 인근 경상감영공원 터에 살다가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오자 그 자리를 내어주고 정착한 곳이 지금의 계산성당 인근 지역(계산동)이다. 두사충은 그 일족과 함께 길쌈을 하여 먹고살고자 계산동 일대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 뽕나무 밭을 일궜다. 그 후 두사충은 최정산(最頂山·현 대덕산) 기슭으로 옮겨가고 민가가 들어섬에 따라 뽕나무는 대부분 사라졌으나 뽕나무 골목이란 이름으로 두사충의 전설은 아직까지 전해온다.
◆명나라 풍수지리 전문가, 조선에 오다
두사충은 명나라 두릉(杜陵) 사람인데 시성 두보(杜甫)의 21대손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명장 이여송을 따라 조선에 들어온 풍수지리참모(水陸地劃主事)였다. 조선에 처음 들어온 두사충은 한반도의 지세와 산세를 보고 큰 인물들이 많이 나올 것이라 예견하고 그렇게 되면 명나라가 곤경에 처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를 이여송에게 보고하자 이여송은 두사충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선의 혈맥을 끊어놓으라고 지시했다. 이에 두사충은 진을 치는 자리를 잡는데 소홀히 하고 조선의 혈맥을 끊는데 주력하였다. 그 결과 평양성 싸움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던 명군은 벽제관 싸움에서 왜군에 대파 당하였다. 벽제관 싸움의 패인이 진터를 잘못 잡았다는 내부 분석에 따라 두사충은 참수를 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조선의 우의정 정탁과 이시발 등의 구명운동으로 두사충은 간신히 죄를 면탈하게 되었다. 정탁의 시은에 대한 보은으로 두사충은 정탁의 양택과 음택을 잡아 주기도 했다.
그 일로 두사충에게 커다란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 자신은 죽은 목숨이고 조선에서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 사건 이후 두사충은 더 이상 조선의 혈맥을 끊는 일에 앞장서지 않고 혈맥을 피해 말뚝을 박는 등 조선에 매우 우호적인 인사가 되었다. 두사충은 풍수전문가로서 육지 뿐만 아니라 바다에서도 진을 칠 줄 알았고 명에서 같이 온 진린 제독이 그의 매부라 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과도 자주 만나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진법과 전술 전략을 논의하였고 서로를 존경하고 아끼는 사이가 되었다.
◆조선에 감화돼 귀화하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두사충은 명나라로 돌아갔으나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진린 제독과 함께 원군으로 다시 조선에 왔다. 한창 기세가 오른 청의 국운을 예견해 보건대 그의 조국 명은 바람 앞에 등불 격인 반면 조선은 지세가 수려해 큰 인물이 많이 나고 국운이 상승하여 장차 세계적 국가로 발전할 소지가 충분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의 수려한 풍수를 입증하기에 충분한 영웅이었다. 명이 멸망하고 청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두사충은 자신이 청의 신하가 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으므로 조선에 귀화할 마음이 없지 않았다. 이에 두사충은 사위 나학천(羅鶴天)과 두 아들을 데리고 조선에 들어왔다. 이순신 장군은 당쟁에 휘말려 죽을 고비를 겪고 류성룡의 건의로 겨우 백의종군하면서 전력이 약화되어 있었고 그나마 총상을 입어 고통 받고 있었으나 연속되는 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두 차례에 걸친 전란을 마무리하였으나 그 자신은 적의 흉탄에 장렬히 산화하였다. 이를 지켜 본 두사충은 크게 감동하여 조선에 귀화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이순신 장군의 음택을 잡아주었다. 이순신 장군과 두사충의 우정은 그 자손들에게 계속 이어져 이순신의 7대손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인수는 대구 만촌동 소재 두사충의 묘 앞에 비석을 세우고 이순신이 두사충에게 써준 시'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를 찬하였다.
북으로 가서는 고락을 함께하고 (北去同甘苦)
동으로 와서는 생사를 함께하네 (東來共死生)
성 남쪽 타향의 달빛 아래 (城南他夜月)
오늘 한잔 술로써 정을 나누세 (今日一盃情)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그가 원하는 곳에 식읍을 주어 살게 해 주었다. 두사충은 그동안 조선 팔도를 다니면서 봐 두었던 곳, 현 경상감영공원 자리를 달라고 요청하여 조선 조정의 승낙을 받았다. 그 자리는 하루에 천량이 나오는 길지였다. 경상감영공원 자리는 그 후 대구의 중심이 되었고 인근 향촌동은 한동안 대구의 중심상업지로 불야성을 이루었는데 두사충의 말대로 하루에 천량이 나오는 땅이 되었다. 두사충이 경상감영공원 자리에서 2년 남짓 살고 있던 선조 34년(1601년) 당시 상주에 있던 경상감영이 대구로 이전함에 따라 두사충은 대구의 중심지 격이었던 자신의 땅을 흔쾌히 경상감영 터로 내어놓았다. 아무리 명당이라 하더라도 나라가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조정은 이러한 두사충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갸륵히 여겨 당초 면적의 갑절에 해당하는 땅을 대토해 주어 그 가솔을 이끌고 편안히 살도록 하였다. 이 시기, 그의 조국 명에 처를 두고 온 까닭에 한창 외로움을 타던 두사충은 사랑을 펼칠 수 있는 명당인 계산동을 골라잡아 이사하였다. 여기서 두사충은 늘그막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사한 보람이 확실히 있었다.
◆뽕잎 따며 맺어진 사랑
두사충은 조선의 열악한 의복 문제를 해결하고 생활의 안정도 꾀하고자 인근에 뽕나무를 많이 심게 하고 식솔들에게 길쌈을 권장하여 계산동 일대를 두릉 두 씨 세거지로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두사충이 뽕나무에 올라가 뽕잎을 따다가 이웃집에서 절구를 찧던 미모의 아낙네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날로 두사충은 뽕나무에 올라가 뽕잎을 따는 일이 하루 일과가 되어버렸다. 늘그막에 상사병이 들다시피 해 날마다 뽕나무에 올라 애태우는 아버지를 지켜보던 아들은 마침내 큰 결심을 하고 이웃집을 방문하여 미모의 아낙네를 만나보았다. 그 아낙네는 청상에 홑몸이 되어 수절하고 있던 과부로 두사충을 몰래 흠모하고 있던 터라 쉽게 중매가 되어 두사충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라는 속언이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이 계산동 일대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뽕나무가 거의 사라졌지만 골목 이름만은 뽕나무 골목으로 남아 그 때의 뽕나무밭 사랑을 전해주고 있다. 또 두사충의 계산동 세거지에 1902년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성당 계산천주교회(통칭 계산성당)가 들어서 우리나라 가톨릭의 정신 세계를 이끌고 있는 위대한 도량이 되어 만천하에 사랑을 베풀고 있으니 두사충의 풍수는 신통방통하게 꼭 들어맞았다 하겠다.
길쌈으로 식솔들의 먹고사는 일이 안정되자 두사충은 조선 팔도를 유람하며 자신의 전공인 풍수이론을 갈고 다듬어 두사충결(杜師忠訣)이란 풍수서를 펴내었다. 지금도 두사충결은 풍수를 배우는 학도들의 기본적인 교과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찾은 대구의 명당 터는 어디?
조선 팔도를 샅샅이 헤집고 다니며 명당과 혈을 찾아다니던 두사충도 나이가 들고 병마가 찾아들자 수구초심인지라 고향인 명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정산 아래 좋은 터를 골라 제단을 쌓고 매달 초하루에 관복을 입고 명 황제가 살던 북쪽을 향하여 배례를 올렸다. 집도 대덕산 아래로 옮겨와 섭생하며 고향을 그리워하였다. 연재(蓮齋)라는 아호도 모명(慕明·명을 그리워 함)으로 바꾸고 대명처사(大明處士)라는 호칭도 얻게 되었다. 그 인근 지역도 명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로 대명동(大明洞)이라 이름 붙였는데 지금 대명 11동까지 있는 대명동은 대구에서 가장 면적이 큰 동이 되었다.
평생 풍수를 연구한 두사충은 정작 자기 음택과 관련하여 석연찮은 여운을 남겼다. 어느 날 두사충은 자신의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옴을 느끼고 자식을 앞장 세워 미리 보아둔 자신의 음택을 가리켜주기 위해 가마를 타고 길을 떠났다. 그가 봐 둔 곳은 대구 수성구 성동 현재 고산(孤山) 서당(이하 고산)이 있는 자리였다. 음택을 가리켜주려 떠날 당시 벌써 두사충은 매우 쇠락한 몸이라 도저히 고산까지 가는 동안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 중도에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두사충에게 치명적인 담이 생겨 숨도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곳이 현재의 담티고개다. 그 때, 두사충은 비몽사몽간에 천하의 진룡(眞龍)과 정혈(正穴)은 천하의 공물로 하늘이 보존하고 땅이 감추어 길인을 기다린다는 평소 자신의 생각이 선명히 떠올랐다. 두사충은 고산이 자기 자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아들에게 오른쪽으로 보이는 형제봉을 가리키며 저 산 아래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묘를 쓰라고 하고 그리로 가보자고 했다. 그러나 그리로 가던 도중 두사충은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바람에 두사충이 묻히고자 했던 자리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 후세 풍수가들의 궁금증을 더해주고 있다. 요즘도 두사충의 묘가 있는 모명재(慕明齋)를 찾아 두사충이 소점한 자리를 찾는 풍수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어 두사충의 오묘한 진의가 새롭다.
글. 오철환(소설가 · 대구광역시의원)
그림: 김영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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