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 낙동강 시대] <25>안동 지리(1)

지리 지도
지리 지도
400여년 동안 마을 주민들이 제사를 올리고 있는 이름 없는 무덤, 영세불망지묘.
400여년 동안 마을 주민들이 제사를 올리고 있는 이름 없는 무덤, 영세불망지묘.
임하댐 수몰지로 주민들이 고향을 떠난 마을에는 감나무만이 덩그러니 집터를 지키고 있다.
임하댐 수몰지로 주민들이 고향을 떠난 마을에는 감나무만이 덩그러니 집터를 지키고 있다.
댐 건설로 지리 5개 마을 가운데 갈바들마을이 수몰된 종산 남쪽 반변천변.
댐 건설로 지리 5개 마을 가운데 갈바들마을이 수몰된 종산 남쪽 반변천변.

낙동강 지류, 반변천이 에두른 '지리(支里)'는 아름답고도 구슬픈 마을이다.

영양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은 영양읍에서 장군천 물길을 모아 남쪽으로 흐르다 청기천과 합류한 뒤 청송 진보면을 지나 파천면에서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반변천은 청송 부남면 주왕산을 타고 흘러내린 용전천을 이곳에서 한데 모아 임하댐의 넓은 호수에 들러 숨을 고른다. 이 하천은 서쪽으로 흘러가다 안동댐에서 모였다 남서쪽으로 흐르는 낙동강 본류로 합쳐진다.

반변천이 용전천을 합해 서쪽으로 방향을 트는 지점을 중심으로 하천에 빙 둘러싸여 있는 마을이 안동시 임동면 지리다. 안동 임동면과 청송 파천면 경계 마을이다. 지리는 반변천이 지류인 용전천과 가지(支)처럼 갈라지는 곳에 있다고 따온 이름이다. 가지골, 갓골, 지동(支洞), 지원동(支院洞)으로도 불렸다.

동쪽으로 외살산과 노적봉, 서쪽으로 미산과 한림산, 남쪽으로 반변천과의 사이에 아가산(독산), 북쪽으로 진보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지리는 이 산과 천(川)이 빚어낸 8가지 절경, '지동팔경'을 품은 곳이다.

주민들은 옛날 자신의 땅을 마을 소유로 남긴 채 떠난 이름 모를 조상을 위해 수백 년 동안 공동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이어오고 있다. 한편으로 80년대 임하댐 건설로 마을 공동체의 추억 상당부분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댐 건설로 5개 소규모 마을 가운데 3개 마을(밀미, 갈바들, 논실)이 물에 잠기면서 많은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고, 상당수 공동체 놀이도 수몰과 함께 사라져버린 것. 지금은 '원지'와 '새밤'만 남았다. 지리는 그렇게 아름다운 전통과 쓰라린 상흔이 공존하는 마을이다.

◆영원히 잊지 않을 묘

음력 10월 어느 날, 마을 어른 10여 명이 산을 오른다. 아가산 기슭을 돌아 종산으로 향한다. 정성스레 마련한 음식을 지고, 장정 두 명이 뒤따른다.

마을 남쪽 아가산 뒤편 종산. 산이 종 모양으로 뾰족하게 솟아 있다. 두 젊은이는 종산 기슭에서 지게를 부린다. 제수 바구니를 내려놓고 짐을 푼다. 자그마한 무덤 앞이다.

반변천이 지류인 용전천을 받아들여 종산과 마을을 휘감고 있는 곳이다. 임하호 최상류인 셈이다. 매서운 칼바람이 귀를 엔다. 물빛은 시리도록 파랗다. 마을을 대표하는 노인들은 칼바람과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뭇 진지하다. 돼지고기, 떡, 과일을 차례로 무덤 앞에 놓고, 술을 따른다. 제주는 10여 명이지만, 이들 중 어느 특정 가문의 조상 제사가 아니다. 무덤 속 주인의 성도, 이름도 알지 못한다. 무덤이 언제 조성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3개의 봉분으로 이뤄진 이 무덤은 한낱 이름 없는 묘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무덤을 조성하고 400여년이 흐른 1984년 주민들이 세운 묘비에는 '영세불망지묘'라고만 쓰여 있다. '영원한 세월 동안 잊히지 않는 묘'

그 묘에는 말 그대로 지리 사람들에게 영원히 잊히지 않을 사연이 담겨 있다.

먼 옛날, 지리에는 딸만 셋이던 한 노부부가 있었다. 부지런한 덕택에 많은 땅을 갖게 됐다. 하지만 노부부는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는 것을 늘 안타까워했다. 마을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노부부는 결국 자신들의 땅을 마을 앞으로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단 유택(幽宅; 무덤) 보호만 부탁했다는 것. 이 이야기는 수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실제 그 노부부가 마을 앞으로 물려준 땅 3천여 평은 상당부분 마을 공동사업을 위해 쓰였고, 지금도 일부(400평가량)는 마을 소유로 등기돼 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봉분의 세 주인공이 마을에 땅을 내놓은 노부부와 다른 어떤 이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병호(70) 씨는 476년 전 안동 김 씨들이 이 마을에 들어오기 전 해주 오 씨들이 가장 먼저 정착했다는 점에서 무덤의 주인은 해주 오 씨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옛날에 그분이 아들이 없어 가지고, 딸은 출가외인이라 남의 집에 시집가 가지고 그 집에서 살아야 돼. 아무도 없잖아. 그럼 묘가 묵게 되잖아. 옛날부터 동장들이, 지금은 이장이 직접 제수를 준비해 가지고 마을을 대표하는 어르신들 몇 분이 묘에 찾아가서 제를 올렸지. 날짜는 특별하게 정해놓지 않고 음력 10월 스무날 전에 지낸다고."

◆영원히 잊힐 마을

'밀미, 갈바들, 논실'

지리의 이 작은 세 마을은 20년 전 사라졌다. 앞으로 수십 년이 흐르면 영원히 잊히게 될 지도 모를 마을이다. 1984년 12월 착공, 93년 12월 완공한 임하댐은 지리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지리 5개 마을 중 3개 마을을 물속에 잠기게 했고, 1개 마을(원지)을 북쪽으로 옮겨놓았다. 수몰지에서 벗어난 새밤만 원래 터전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임하댐 수몰지구 주민들은 88년을 전후해 대다수 보상을 받고, 1~2년가량 임시 거주지 등에서 생활하다 90년쯤 모두 흩어졌다. 보상을 꽤 받은 주민과 젊은이들은 마을을 떠났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구하기 힘들거나 고향을 버리지 못한 노인들은 원지나 새밤으로 옮겨 다시 둥지를 틀었다.

마을 서쪽 눈썹 모양의 미산 아래 밀미. 수몰 전 반변천에서 목욕하고 다슬기도 잡던 20가구는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은 김원일(61) 씨와 숙모인 김봉순(71) 씨 등 2가구만 인접한 새밤으로 옮겨 살고 있다. 밀미에서 임하호에 수몰되지 않은 일부 지역에는 옛 집터를 상징하는 감나무 몇 그루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김원일 씨는 "보상을 쪼매(조금) 타이끼네 나가지도 못하고, 맨 시골생활 해야 돼서 여기에 정착한 거지 뭐. 갈 데도 올 데도 없어서 나가면 뭐 할 거 있나"라고 말했다.

냇가에 갈대가 많았던 갈바들. '갈대밭이 넓은 앞들'이라고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갈바들 25가구도 수몰로 인해 모두 마을을 떠났다. 반변천의 원 물줄기와 지류인 용전천이 만나는 지점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렸던 김성출(65) 씨 등 2가구만 현재의 원지로 옮겨 살고 있다.

"지금은 댐으로 합수가 안 보이지만은 그때는 우리 동네 갈바들 앞에서 청송물(용전천) 하고 영양물(반변천)이 합수가 돼 가지고. 여울 밑에 보면 깊은 소가 있어. 그 물을 놓으면 쏘가리와 꺽지, 뱀장어와 메기처럼 좋은 고기 나오고. 댐 들어서고는 물고기 안 잡았어요."

지리의 마지막 수몰지, 논실. 논이 많은 지역이라고 논실 또는 답곡이라고 불렸다. 논실의 17~18가구는 모두 외지로 이주한 바람에 논실의 추억을 얘기할 이가 이젠 남아있지 않다.

임하댐 건설로 지리 5개 마을이 해체되면서 마을 공동체 놀이도 사라졌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 아가산 앞 마을 중앙 지양못에서 벌이던 쥐불놀이는 이제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수몰 전에는 원지와 갈바들이 한 편, 새밤과 밀미, 논실이 한 편으로 나눠 쥐불놀이를 즐겼던 것. 봄이 되면 5개 마을 부녀자들이 아가산 기슭에서 참꽃으로 전을 붙이며 즐겼던 '화전놀이', 남정네들이 반변천변에서 함께 모여 벌였던 '천렵'도 20년 전 뒤안길로 묻혔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이가영·김수정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권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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