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공양하십시오."
4일 오후 대구의 한 병원에서 만난 홍정자(59·여) 씨는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홍 씨는 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해진(海眞·36) 스님도 홍 씨를 '엄마' 대신 '보살님'이라고 불렀다. 지난 2000년 봄, 해진 스님은 "산으로 들어가겠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집을 떠났다. 그때부터 '고지현'이라는 세상의 이름을 버렸다. 세상에서 받은 커다란 상처 때문에 그는 불가에 귀의했다. 깊은 불심도 마음의 병을 고치지는 못했다. 가슴속 상처는 점점 덧나 육신의 병이 됐다. 당뇨 합병증으로 온몸이 퉁퉁 부은 스님은 속세의 어머니 도움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두 번의 상처
1996년 10월, 선선한 바람이 불던 어느 가을 밤이었다. 연세대 화학과 3학년이었던 지현 씨는 학교에서 밤늦게 실험을 하고 경기도 성남에 있는 집으로 가고 있었다. 신촌역에서 외가가 있는 오리역까지, 지하철로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매일 오갔다. 주택가로 들어섰을 때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지친 그의 몸을 덮쳤다. 남자는 지현 씨의 입을 막은 채 골목으로 끌고 갔고 저항하는 그를 주먹으로 사정없이 때렸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수백 번 소리쳤다. 도움은 늦게 왔다. 한 중년 남성이 현장에 도착해 불빛을 비추자 남자는 주먹질을 멈추고 달아났다.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머리는 퉁퉁 붓고 눈알은 고춧가루를 뿌린 것처럼 피멍이 들었다. 마음의 병을 얻은 것도 그때부터였다.
사고 직후 지현 씨는 휴학을 하고 부모님이 있는 충북 청주로 내려갔다. 움푹 팬 가슴속 상처를 치료할 곳이 필요했다. 그는 밤이 두려웠다.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것 같다며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을 홀로 하얗게 지새웠다. 해가 뜨면 잠이 들었다. 홍 씨는 그런 딸이 가여웠다. 사고 후유증은 깊고 또 지독했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마음의 병이 조금씩 나을 무렵, 두 번째 악몽이 찾아왔다. 청주에서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똑같은 변을 당했다.
"소리 지르면 죽인다."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첫 사고 이후 지현 씨는 어머니가 사준 가스총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남자의 얼굴에 가스를 발사한 뒤 가까스로 빠져나왔고 주변인의 도움으로 범인도 잡았다. 반복된 사고는 그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지현 씨도, 어머니도, 가족들도, 더는 사고가 일어난 공간에서 삶을 일궈나갈 자신이 없었다. 지현 씨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됐다. 당뇨가 찾아와 혈당 수치가 높아졌고 병원에서 신세를 지는 날이 늘었다. 그때부터 지현 씨는 세상을 불신했다.
◆세상을 버리다
2000년 봄, 그는 세상을 버렸다. 짐을 싸 머리를 깎고 경북 김천의 청암사로 들어갔다. 아픈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사고 현장에서 먼 곳으로 떠났다. 해진 스님 가족도 청주를 벗어나 대전으로 이사했다. 스님은 학교에서의 배움과 인연 등 모든 것이 헛되다고 여겼다. 그곳에서 바다 해(海), 참 진(眞), '바다처럼 넓고 진실되게 살라'는 뜻의 법명을 받았다. 홍 씨는 떠나는 딸을 붙잡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사회 생활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 또한 운명이라면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며 비구니가 된 딸을 받아들였다.
스님이 된 딸은 수행하고 홍 씨 부부는 일을 했다. 아버지 고명진(가명·61) 씨는 공무원으로, 어머니는 식당 일을 하며 둘째 딸 지영(가명·35) 씨와 막내 아들 지훈(가명·31) 씨와 함께 살았다. 스님이 출가한 지 4년째 되던 해였다. 약했던 몸이 고된 수행으로 더 나빠졌다. 절에 쓰러져 있는 스님을 홍 씨가 데리고 나왔다. 쓰러진 스님은 두 달간 김천의료원에서 누워 지냈다. 생사를 넘나드는 스님을 보며 홍 씨는 죽음을 준비했다. 영정 사진을 찍고 스님의 골분을 뿌릴 곳까지 생각했다. 생명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스님은 의식을 되찾았다. 그때부터 홍 씨는 일을 그만두고 스님 곁을 지키며 간호했다. 건강을 잠시 되찾았지만 절을 떠난 시간이 길어지면서 스님은 청암사에 다시 들어갈 수 없게 됐다.
"죽더라도 청암사 주춧돌을 베고 죽어야 하는데, 왜 저를 끌고 나오셨습니까."
스님은 홍 씨 앞에서 눈물을 뿌렸다. 스스로 제 몸을 지킬 수 없음에, 수행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낙심했다.
◆흩어진 가족들
스님의 투병 생활이 이어지자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비구니가 된 언니, 그 언니를 위해 집을 비우고 따라다니는 어머니를 둘째 지영 씨는 이해하지 못했다. 지영 씨는 4년 전부터 부모님과 연락을 끊었다. 홍 씨는 "둘째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아버지 고 씨는 7년 전 직장을 그만둔 뒤 혼자 대전에 남아 주차관리요원 일을 한다. 직장을 나온 것도 퇴직금을 받아 스님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서였다. 그것도 모자라 은행에서 2천만원을 대출 받았다. 한달 벌이 70만원으로 스님과 홍 씨를 부양하고 있다. 막내 지훈 씨는 경기도에 있는 자동차 부품공장 기숙사에서 지낸다. 아버지 혼자 지내는 단칸방을 보면 마음이 더 쓰려서다. 청주를 떠나 대전으로 온 뒤 고향집은 완전히 사라졌다.
모래알처럼 흩어진 가족, 어깨를 짓누르는 병원비는 홍 씨를 더 고단하게 만든다. 홍 씨 부부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도 없다. 그에게 근로 능력이 있는 두 자식이 있는 셈이기에 병원비는 고스란히 부모의 몫이다. 홍 씨는 "나만 정직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며 눈물을 흘렸다. 모든 것이 전생의 '업'이라고 여겨도 감당하기 힘든 벌이었다. 두 번의 사고 이후 가정은 무너졌고 스님은 불심으로도 치유되지 않는 육신과 마음의 불치병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저는 '빽'도 없고 돈도 없고 배운 것도 다 소용없는 사람입니다. 부처님을 따라가고 싶은데 내 몸이 말을 듣지 않네요."
스님에게는 아무런 울타리가 없어보였다. 스님은 그렇게 병실 침대에 누운 채 세상 사람들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 이웃사랑 계좌는 '069-05-024143-008(대구은행), 700039-02-532604(우체국) ㈜매일신문사'입니다.
댓글 많은 뉴스
"탄핵 반대, 대통령을 지키자"…거리 정치 나선 2030세대 눈길
민주, '尹 40% 지지율' 여론조사 결과에 "고발 추진"
젊은 보수들, 왜 광장으로 나섰나…전문가 분석은?
윤 대통령 지지율 40%에 "자유민주주의자의 염원" JK 김동욱 발언
尹 탄핵 집회 참석한 이원종 "그만 내려와라, 징그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