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침몰 사건 등으로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은 두 가지를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 하나는 우리가 분단 국가에 살면서 적(敵)과 대치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이란 존재에 대한 인식, 더 나아가 나라의 소중함, 나라사랑(애국·愛國)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것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이 나라에는 '하기 쉬운 애국'이 물결을 이루기 시작했다. 축구나 야구 경기장에 가서 "대~한민국"이라고 외치고 손뼉을 치면 나라사랑을 다하는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없지 않아졌다. 물론 이것도 나라를 사랑하는 하나의 행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작은 애국'일 뿐이다. 내가 즐거운 나라사랑, 나의 스트레스를 푸는 그런 나라사랑을 훨씬 뛰어넘는 더욱 큰 나라사랑이 엄연하게 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이 가진 재산은 물론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던지며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숭고한 애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외침이 숱하게 반복된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자신의 희생(Sacrifice)을 바탕으로 나라사랑을 실현한 이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
#1.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십여 명은 될 것입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뜨거운 햇볕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덜썩 안기고 싶습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거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어머님!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테니까요….'
6·25전쟁 당시 군번도 군복도 없이 교실을 뛰쳐나와 인민군의 침공에 맞서 스스로 전쟁터에 뛰어든 학도의용군이 남긴 편지다. 중학교 3학년 학생의 신분으로 참전한 이 학도병의 주머니 속에서 발견된 피로 얼룩진 메모지에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애끓는 글이 적혀 있다.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이 학도병은 동료 71명과 함께 1950년 8월 11일 새벽 포항여중 앞 전투에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인민군과 접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포항시 용흥동 탑산에 있는 가로 2m, 세로 0.5m, 높이 1.2m 규격의 화강석 편지비.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담은 학도의용군의 편지가 검은 비석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60년이 넘는 세월의 거리를 뛰어 넘어 비석을 가만히 어루만지다 보면 그 당시 생사의 갈림길에 서서 삶에 대한 진한 애착,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그리고 그것을 초월한 조국을 위한 고귀한 희생과 큰 사랑이 절로 느껴진다.
#2. 1914년 12월 23일 동짓날, 영덕군 영해읍의 한 바닷가. 영양의 선비인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1852~1914)은 시(詩) 한 편을 남기고 차가운 동해 바다로 스스로 걸어들어가 목숨을 끊었다. 도해순국(蹈海殉國)을 한 것이다. 나라가 기울어지는 암울한 시대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했던 김도현은 끝내 나라가 망하자 순국의 길을 택했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아버지가 살아 계셔서 4년 후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바다로 걸어들어가 삶을 마감했다. 동포들에게 보내는 유시에서 그는 모두 일어나 왜노(倭奴)와 싸우기를 당부하면서, 스스로 동해에서 죽어 왜적을 멸망시키겠노라 다짐했다. 따라온 조카에게는 자신의 시신을 찾지 말라고 일렀다. 바다로 걸어 들어가 순국한 벽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영덕군 영해읍 대진해수욕장에는 '도해단'(蹈海壇)이 조성돼 있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은 '천추대의'(千秋大義)라는 친필을 올렸으며 이를 돌에 새겨 비를 세웠다.
우리나라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위기와 극복이 거듭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수백여 차례에 걸쳐 외부로부터 침입을 받았지만 끝내 위기를 극복하고 나라를 보전했다. 위기 극복과 나라 보전에는 앞에서 든 어느 학도병이나 벽산 김도현처럼 목숨까지 바쳐가며 나라사랑을 실천한 이들의 거룩한 희생이 밑거름이 됐다.
특히 경북인은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호국정신을 실현하며 나라를 지키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경북은 한국 독립운동의 발상지이자 성지이다. 지금까지 국가보훈처에 의해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인원은 약 1만1천800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대구경북 사람이 2천 명에 육박하고 있다. 다른 지역의 몇배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이 지역이 차지하는 위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우국지사들이 앞다퉈 자결하면서 일제 침략에 항거했다. 이 사람들을 자정순국자(自靖殉國者)라 부르는데, 가장 많은 자정순국자가 나온 것도 바로 경북이었다. 또한 유림의 독립운동, 만주지역 독립군기지 건설에서 빼어난 역할을 한 것도 경북 사람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운동에서도, 아나키스트 투쟁에서도, 의열투쟁에서도 경북은 단연 돋보이는 활약을 했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는 "경북인은 항일투쟁지 전 시기와 대부분의 투쟁 분야에 대부분 참가한 특징을 보였다"며 "경북인들이 벌인 독립운동에서는 혁신과 전통, 그리고 이들의 통합이라는 성향과 격정성, 자기희생, 애민정신이 녹아든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 민족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6·25전쟁. 대한민국이 이 전쟁에서 반전의 계기를 잡는 것은 낙동강 방어전이었다. 왜관에서 포항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에서 격렬한 전투를 통해 버텼기에, 인천상륙작전이란 전쟁의 흐름을 바꾼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낙동강 방어전의 지원자를 모으고 구하는 현장은 경북이었고, 학도의용군을 모을 때 가장 많은 자원이 이곳에서 살던 사람이었다. 피란민을 안고 살아가는 역할도 경북인이 해냈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조국의 운명을 되살려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경북인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낙동강 방어전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것은 물론 과소평가되고 있다. 전쟁을 뒤집은 것이 인천상륙작전으로만 이야기될 뿐 낙동강 방어전에 대한 평가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한달 보름을 지켜낸 낙동강 방어전이 없었다면 인천상륙작전이 없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이란 존재조차 없었을 것이란 게 역사학자들의 이구동성이다. 이 낙동강 방어전에서 경북인은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호국의 첨병역할을 해냈다.
경북인들은 가깝게는 6·25전쟁에서, 멀게는 독립운동을 통해 격정정인 투쟁성과 자기희생을 실천했다. 그 밑바탕에는 나라와 겨례를 향한 사랑이 녹아들어 있었다. 김희곤 교수는 "호국정신은 경북의 상징이며, 나라를 지켜간 핵심사상"이라며 "항일투쟁과 전쟁 속에서 경북인이 보인 특성은 격정적인 투쟁성이었고, 자기희생이며 나라사랑·겨레사랑 정신이었다"고 강조했다.
어느 지역에 비해서 가장 두드러진 호국정신을 발휘한 곳이 경북이었다. 의리, 충의, 지조, 의기를 바탕으로 나라사랑을 올곧게 경북인들은 실천한 것이다. 경북인이 자랑할 수 있는 혼 가운데 하나가 호국정신, 나라사랑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 했다.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원래 뜻은 풍족할 때는 사람들의 인품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그때의 처신에 따라 인품이 드러난다는 뜻이지만 보다 더 넓게 해석할 수도 있다. 나라와 겨레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나 자신의 목숨을 던지며 나라사랑을 실천한 애국열사들에게 이 말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겨울이 되어야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평소에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있다가 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구보다 먼저 나라사랑을 몸소 실현한 것이 바로 경북이었다.
이대현 사회2부장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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