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해 말 대구시 중구 반월당역 메트로센터 에스컬레이터.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주부가 20대 여성의 발을 밟았다. 난감한 표정의 40대 여성이 미안하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아 주춤한 사이 20대 여성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반말. "아줌마! 사과 안 해? 아이 재수 없어." 이 말을 들은 40대 여성도 화를 참지 못해 "이런 되바라진 아가씨를 봤나? 몇 살이야?"라고 반문했고 이내 난리가 났다. 주변 사람들까지 말렸지만 막말이 오가고 몸싸움이 계속됐다. 결국 사태는 경찰이 와서야 진정됐다.
#2. 올 초 대구의 시내 한 보석 가게. 40대 주인은 요즘 젊은 세대의 반말과 속어에 이제 익숙해졌다고 체념한 듯 고백했다. "얼마 전 두 여성이 함께 목걸이를 보러 왔는데, '와! 이거 진짜 예쁘다! 완전 맘에 드는데…, 아저씨, 이거 얼마?". 처음에 이런 말을 들을 땐 가슴이 턱턱 막혔지만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아! 예~, 세일해서 9만9천원입니다. 딱 어울리네요." 사지도 않고 가고 나면 더 허탈하지만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마음을 달랜다.
언제부터인지 반말이 대세다. 아예 존댓말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바쁜데 나이나 계급 따질 게 뭐가 있느냐는 분위기다. 이미 상대에 대한 배려나 양보는 사라진 지 오래고 노인들조차 젊은 세대들에게 존경받는 걸 포기하고 있다.
지난달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지하철 반말녀' 동영상은 충격이다. 아예 존댓말 개념 상실 그 자체였다. 시쳇말로 새파란 처녀가 할머니뻘 노인에게 내뱉은 말은 대충 이렇다. "어디서 함부로 남 말하는데 끼어드냐? 그러니까 욕이나 처들어먹지." 요즘 개그콘서트에서 유행하는 말로 "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죠."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있다.
경북대 심리학과 김지호 교수는 "자신이 편리한 대로 세상을 살고, 나만 소통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아무 말이나 생각 없이 내뱉게 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며 "인터넷,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의 발달도 빠른 소통을 원하는 특성 탓에 짧고 임팩트 있는 반말이나 반말성 줄임말이 더 확산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예 반말로 갑시다"
굳이 존댓말이 필요없다는 시대적 대세의 반영이다. 유독 존댓말과 윗사람에 대한 예의를 강조하는 나라이다 보니 너무 격식에 얽매이고, 나이 한두 살 차이에도 호칭을 가지고 싸우는 일도 자주 발생하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깔끔한 소통 위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회사나 모임에서도 특별히 욕을 하거나 무시하는 언사가 아니라면 반말투도 괜찮다고 여기는 이들이 실제 적잖다.
출판계에 종사하는 한이주(가명·31·여) 씨는 "회사 선배들에게 거의 반말이 일상화되어 있다"며 "굳이 길게 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는 담당 국장에게도 서슴없이 반말투로 얘기하는데 다들 그러려니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유통업에 종사하는 이세윤(35) 씨도 "권위주의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는데, 조선시대식 유교 문화와 동방예의지국을 강조하며 존댓말을 꼭 사용하라는 분위기는 문제가 있다"며 "요즘 사람들은 모임에서도 말을 길게 하고, 너무 어렵게 대하는 것을 더 참기 힘들어한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우리 결혼했어요'라는 한 프로그램에서는 소녀시대 서현과 씨엔블루 정용화 커플이 직접 부른 '반말송'이 핫이슈가 되고 있다. 지난달 27일 유튜브엔 정용화가 작사·작곡하고, 서현이 작사에 참여한 이 가상 부부의 반말송 영상이 올라왔는데, 업로드 3일 만에 조회 수 130만 건을 넘기며 네티즌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두 사람이 함께 부른 '반말송'은 정용화가 자신에게 아직까지 존댓말을 사용하는 서현과 조금 더 가까워졌으면 하는 마음에 만든 곡이다. 이를 본 네티즌들이 서현에게 빨리 반말로 바꾸라는 댓글을 달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우리 언어에서 아예 존댓말을 없애자는 극단적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특히 이들은 대한민국의 존댓말은 외국인들이 말을 배우는 데 힘들기 때문에 대폭적으로 간소화하고, 너무 복잡한 존칭은 생략하는 것이 맞다고 여기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아닙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존칭이 엄연히 존재하는 품격 있는 말이다. 게다가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대한민국을 지탱해주는 힘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 나이 든 사람에 대한 공경이 그 첫 번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존댓말이 여전히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사람들의 사고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반말보다는 존댓말에 대한 공감대가 넓다.
5일 사석에서 만난 김정필 전 천하장사는 "친한 씨름계 선배에 대해서는 존댓말로 예우를 한다"며 "아무에게나 막 대하는 것은 순간에는 편한고 친한 것처럼 느껴지나 결국 시간이 지나면 함부로 대하고, 반말성 막말을 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일침을 놨다.
이랜드 동아백화점 쇼핑점 유월종(40) 시계매장 점장은 "매장에 오시는 손님들 중 반말투로 하는 젊은 손님들이 많지만 아무래도 예의 바른 존댓말을 하는 손님들에게 더 친절하게 대하게 된다"며 "굳이 남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말투가 왜 시대적 대세가 되어야 하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젊은 세대지만 비비안 매장에서 일하는 조선영(19·여) 씨는 "친구들은 반말을 많이 쓰는데 전 나이 든 분에게 반말로 얘기하면 제가 더 불편하다"며 "존댓말로도 짧고 간명하게 소통할 수 있다"고 존댓말을 쓰자는 쪽에 한 표를 던졌다.
영남대 김은아 유아교육과 겸임교수는 "말은 마음의 창"이라며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사라진 사회에서 거친 말이 판치는 분위기는 우리 사회의 악순환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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