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약은 오랫동안 국민건강 지킴이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왔다. 찬바람이 불면 주부들은 입버릇처럼 "보약이라도 한 첩 지어야겠네"라는 말을 했다. 특히 수험생을 둔 부모들은 거의 예외없이 보약을 짓기 위해 한의원을 찾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보약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건강기능식품이 보약의 대체재로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건강기능식품이 입지를 넓혀감에 따라 점점 설 땅을 잃어가는 보약의 현주소를 살펴봤다.
◆건강기능식품 약진-홍삼이 첨병
국내에 건강기능식품 선호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는 2000년 들어서다. 그 선두에는 홍삼제품이 있다. 홍삼제품은 홈쇼핑을 대표하는 효자상품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됐다. 또 명절 선물로도 상종가를 기록하고 있다. 롯데백화점에 따르면 지난해 설 명절 선물 예약판매 결과, 홍삼이 정육과 과일을 제치고 매출 1위를 차지한 것으로 드러났다.
홍삼의 인기를 반영하듯 홍삼시장도 급성장하고 있다. 한국인삼공사에 따르면 국내 홍삼시장은 2004년 4천여억원 규모에서 지난해 1조원대로 성장했다. 업계에서는 몇 년 안에 홍삼시장 규모가 6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시장 규모가 커지면서 홍삼시장을 장악하려는 경쟁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선두주자인 한국인삼공사를 비롯해 NH·롯데제과·동원F&B·천지양·웅진식품 등은 잇따라 신제품을 선보이며 소비자들을 공략하고 있다. 여기에 중소 홍삼제조업체들까지 가세해 홍삼시장은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할 만큼 치열한 각축장이 되고 있다.
◆된서리 맞은 보약시장
고수익을 보장받던 전문직이라는 수식어가 한의사들에게 옛말이 되고 있다. 한의사들은 한결같이 "매출이 크게 떨어졌다. 힘들다"며 하소연하고 있다. 한의계에 위기감이 고조된 원인은 다양하지만 가장 큰 이유로는 건강기능식품의 약진에 따른 보약 수요 급감이 꼽히고 있다.
대구 수성구에 있는 A 한의원의 경우 몇 년 전부터 보약 판매가 급격히 떨어져 울상이다. 보약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겨 하루 한두 첩의 보약을 처방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대구시한의사회에 따르면 한의원마다 차이는 있지만 보통 한의원은 치료와 보약이 매출의 절반씩을 책임지고 있는 수익 구조를 갖고 있다. 매출의 절반을 차지하던 보약 시장에 찬바람이 불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의원이 속출하고 있다. 치료보다 보약 비중이 높은 한의원일수록 사정은 더 심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출이 70% 이상 감소한 한의원도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한의계에서는 폐업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수성구 시지에 있던 B한의원이 문을 닫았다. 보약 판매가 급감하면서 직원 월급·임대료 등을 감당할 수 없어 결국 폐업을 선택한 것이다. 지난해 수성구 시지·신매 지역에서 문을 닫은 한의원은 4곳에 이른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폐업 한의원 수는 2005년 668곳, 2006년 776곳, 2007년 843곳, 2008년 823곳으로 매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수성구에 있는 C한의원 원장은 "과거에는 몸이 안 좋거나 유난히 감기에 많이 걸린다고 생각되면 보약을 지었지만 지금은 홍삼 등 건강기능식품을 찾고 있다. 보약 구매자들의 상당수가 건강기능식품 시장으로 넘어갔다. 어린이용 홍삼도 인기를 끌면서 어린이용 보약 수요까지 크게 줄었다. 한의원은 광고도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광고 공세를 통해 소비자들을 유인하는 건강기능식품에 맞설 수도 없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한약재 불신도 한몫
한약재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것도 보약 수요가 급감한 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잊혀질 만하면 불거지는 수입산 한약재 중금속 오염 파문과 수입산의 국산 둔갑 소식이 보약 대신 건강기능식품으로 소비자들이 눈을 돌리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 한의사들은 "수입산 한약재에 대한 불신으로 한방 자체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보약판매가 눈에 띄게 줄었는데 수입산 한약재를 둘러싼 유해성 논란이 고객층 이탈을 가중시키고 있다"며 입을 모으고 있다.
주부 박선정(40·대구 남구 이천동) 씨는 "가끔 부모님을 위해 보약을 짓는다. 수입산 한약재에 대한 안 좋은 소식이 많이 들려 보약을 지을 때마다 돈을 몇 배로 더 주고 좋은 약재로만 한약을 지어 달라고 부탁을 한다. 하지만 어떤 약재가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어 보약 짓기가 망설여진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주봉 대구시한의사회 홍보이사는 "일반적으로 처방에 사용되는 한약재는 200~300여 가지에 이르는데 국내에서 생산되는 한약재는 30% 정도에 불과하다. 불가피하게 70% 정도는 중국, 베트남 등에서 수입을 해야 한다. 그런데 식품으로 통관된 한약재와 의약품으로 수입된 한약재는 품질과 가격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일부 수입업자가 식품용으로 수입된 저가의 한약재와 의약용으로 수입된 고가의 한약재를 섞어 판매하면 한의원에서도 구별하기 어렵다. 한약재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에 한약재 이력추적제 도입을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의원 수익 다각화에 주력
한의계의 관심사가 보약에서 치료로 옮겨가고 있다. 수요가 없는 보약 분야를 포기하고 치료 분야를 강화해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다. 현대적인 의료장비를 이용한 한방시술이 급증하고 있는 이유다. 한의사가 CT(컴퓨터단층촬영)를 사용해 진료하거나 피부과 의료장비인 IPL로 시술하는 것이 점차 보편화되고 있다. 또 비만과 성형 등 특화된 진료를 통해 수익 다변화를 모색하는 한의사들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류성현 대구시한의사회 회장은 "속된 표현으로 한의사들이 편하게 앉아서 돈 버는 시대는 지나갔다. 외부적인 요인뿐 아니라 내부 경쟁도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매년 많은 한의사가 배출되다 보니 대도시의 경우 한의사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한의사마다 특화된 분야를 개발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말했다.
◆건강기능식품 맹신은 금물
건강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반영하듯 건강기능식품이 넘쳐나고 있다. 이에 대해 한의계에서는 건강기능식품을 먹는 것은 좋지만 맹신은 금물이라고 지적한다. 건강기능식품은 인체에 유용한 기능성을 가진 원료를 사용해 만든 식품을 말한다. 반면 보약은 한의학 이론을 바탕으로 질병 예방이나 치료에 사용되는 약재를 혼합해 조제한 한방 의약품이다. 식품의 한 종류인 건강기능식품이 의약품인 보약을 대체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 한의계의 설명이다.
류성현 회장은 "건강기능식품은 모든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제품으로 말 그대로 식품이다. 하지만 보약은 개인의 체질, 증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처방한 일종의 맞춤약이다. 보약과 건강기능식품을 동급으로 취급해 건강기능식품을 맹신하면 자칫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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