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 직전에 처한 배에서 가장 진지한 대화가 오고 간다.'-레오나르도 다빈치-
바야흐로 미술대학 입시철이라 가끔 조동진의 노래 '행복한 사람'을 들으면 30여 년 전 화실이 떠오릅니다. 연탄난로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입시 준비를 하던 시장통의 화실. 군대 갔다 오고 늦게 시작한 그림 수업이지만 야외스케치를 다녀온 화실 선생님은 꼭 나를 불러 소주 한 병과 안주로 고래고기나 구운 '꼼장어'를 시켜서 피로 회복제로 소주 한잔을 같이하고 나서 수업을 시작하곤 했습니다. 예쁜 여고생 사이에서 진지하게 그릴 수밖에 없었던 데생과 수채화. 절실하면서도 아름답던 시절이었지요.
화가들에게 자기 화실을, 멋진 작업실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최근 몇 점의 드로잉을 한 대구 남산동의 작업실은 내 공간은 아니지만 후배가 아무 조건 없이 쓰라고 해서 편하게 드나드는 곳입니다. 공간은 평범합니다. 문이 있고 환풍기가 달려있고 작은 침대가 있습니다. 작업실 벽에는 몇 장의 사진이 붙어 있는데 대부분 아는 동료들의 얼굴입니다. 어느 겨울날, 그림 그리는 벗들이 모여서 한적한 시골집 모퉁이에서 돼지고기를 구워 소주라도 한잔하는 모습입니다. 누군가가 사진이라도 한판 찍자 하고 "이쪽으로 쳐다보세요" 하고 셔터를 누르면 대개 사진이 나오지요. 퍽 정겹습니다. 말라버린 유화물감이 짜여진 팔레트, 오래된 이젤, 길쭉한 탁자, 육중한 소파, 그리고 몇 권의 책. 아! 그리다 만 캔버스가 여기저기 있습니다.
9일은 일요일인데도 소고기 국밥집이 문을 열어 후배들과 막걸리 한잔하면서 식사를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영화 한 편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제목은 '미술부'로 정했습니다. 부제로 '화려한 날은 가고'라고 정하면 좋겠다고 하니까 감독으로 정한 홍 선생이 이런 제안을 하더군요. '화려한 날은 또다시'가 어떠냐고. 그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식당 주인 아주머니는 서비스가 좋습니다. 막걸리를 계속 먹자 돼지껍데기 안주를 서비스로 줍니다. "식당 벽에 벽화를 그려달라"는 주문까지 합니다. 후배는 "일 년 정도는 식사 대접을 해야 한다"고 흥정을 합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생각해 보겠다. 외상을 해도 된다"며 달력에 체크를 하겠다고 합니다. 영화 한 편을 만들려면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진도가 잘 나가는 것 같습니다. 스토리를 상상해봅니다.
경부선 열차를 타고 서울로 미술실기 대회를 간다. 이 얼마나 멋진 이야깁니까! 좋아하는 여고생 미술반원들 앞에서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팝송이라도 한 곡 부른다면…. 아! 환상입니다. 뭐 통속적인 영화일는지 모르지만, 이런 구상만이라도 행복합니다.
독자 중에는 필자가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 신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닙니다. 저의 화실은 경북 성주군 수륜면이라는 곳에 있습니다. 도시 속 작업활동이나 생활에 지치면 저는 수륜면 가람마을 작업실로 향합니다. 시골 버스를 타면 승객이 서너 명, 그래도 기사는 기분 좋게 달립니다. 밭고랑 사이 녹지 않은 눈이 보는 이를 상쾌하게 합니다. 시원한 강이 나타나고 다리를 지나면 산 밑 마을이 고향같이 포근합니다. 촌로들이 타면 버스 안이 금방 시끌벅적합니다. 온갖 안부를 묻고 농사 걱정까지 합니다. 정겨운 풍경이지요. 잠을 청하거나 생각에 잠기면, 어느새 나의 작업실에 도착합니다. 이십여 년 동안 지낸 어머니 품 같은 화실이지요. 돌담길 지나 계단을 올라서 얼어버린 모과 몇 개가 뒹구는 걸 보며 신발을 툭툭 털고 작업실 문을 엽니다. 차곡차곡 채워진 작업실과 손때 묻은 화구들이 나를 반깁니다.
방을 따뜻하게 하고 잠을 청하거나 책을 보거나 그림 그릴 생각을 합니다. 아니면 올봄에는 텃밭에 무엇을 심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매화 피고 살구꽃 필 무렵이면 한 단지 담가 놓은 모과술이 익을 것이고, 그땐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러 '미술부' 영화를 한 편 만들어야 하는데 배우도 구해야 하고 제작비도 있어야 하는데 "시나리오 진도가 안 나가네" 하면서 또다시 꿈같은 이야기를 할 겁니다.
정태경(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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