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의 魂] 제1부 나라사랑-2)칠곡 다부동에서

"여기서 밀리면 대한민국이 끝장" 55일간 격전, 1만용사 숭고한 희

칠곡 다부동전투 전적기념관에서 만난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칠곡군지회 이현시 회장(왼쪽)과 송종식 사무국장은
지금도 6·25의 전흔이 남아 있어
칠곡 다부동전투 전적기념관에서 만난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칠곡군지회 이현시 회장(왼쪽)과 송종식 사무국장은 "다부동은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만든 역사적인 장소"라고 강조했다.
지금도 6·25의 전흔이 남아 있어 '호국의 다리'로 일컬어지는 칠곡 왜관 낙동강 다리.

1천300리에 걸쳐 대구경북을 비롯해 영남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오랜 세월에 걸쳐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을 기름지게 만들었던 낙동강은 61년 전엔 대한민국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됐다. 우리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 당시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위기에 몰린 이 나라를 지키는데 낙동강이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이다. 낙동강을 사이에 둔 남북한 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국군과 학도의용군은 붉은 피를 뿌리며 조국을 지켜냈다. 낙동강 강변은 물론 낙동강을 따라 굽이치는 산들과 골짜기마다에는 조국을 위해 스러져간 영혼들이 잠들어 있다.

◆전쟁의 물줄기를 바꾼 다부동 전투.

별명이 '불독'인 미 8군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1950년 7월 29일 낙동강 방어선(일명 워커 라인·Walker Line)을 정했다. 천혜의 방어선인 낙동강에서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북한군을 결연코 저지하겠다는 것이었다. "한 치의 땅도 적에게 빼앗기면 수많은 전우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끝까지 싸워 이겨야 한다"는 워커 중장의 전략에 따라 국군과 미군은 낙동강과 인근 고지 및 산과 계곡에 진을 치고 북한군을 맞았다.

낙동강 방어선을 뚫으려는 북한군의 공세도 집요했다. 8·15 광복절 행사를 대구에서 치르겠다는 목표를 잡고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안간힘을 쏟았다.

워커 라인을 지켜내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건국 3년 차를 맞은 대한민국의 운명이 갈라지게 된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 가운데 가장 전략적인 요충지가 바로 대구에서 북으로 22km 떨어진 칠곡 다부동이었다. 다부동이 뚫리면 국군은 10km 남쪽에 있는 도덕산 일대까지 철수할 수밖에 없고 대구는 적의 지상 포화 사정권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작게는 대구, 크게는 대한민국을 지키느냐 여부가 다부동에 걸려 있었다.

북한군은 주력인 제13사단, 3사단, 1사단 등 군단 병력 2만1천여 명을 다부동 일대에 투입, 대구 점령을 기도했다. 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준장)과 미 제27연대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8천200여 명의 병력으로 이에 맞섰다.

다부동전투는 국군과 북한군이 모든 전투력을 동원한 결전이었다.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 동안의 치열한 격전 끝에 국군 제1사단의 필사항전으로 북한군의 예기를 꺾고 대구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1사단은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328고지(석적면 포남리)~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대구를 지켜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2일간 주인이 15번이나 바뀐 328고지 전투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837고지(칠곡 가산 학산리) 탈환전 등 치열한 싸움을 벌인 다부동전투에서 아군은 1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적군은 1만7천5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다부동 계곡에서는 개전 이래 최초로 전차전도 전개됐다. 또한 다부동전투를 통해 국군과 미군과의 실질적인 연합작전이 처음으로 이뤄졌다.

다부동전투의 승리는 전세를 역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대구와 부산 교두보 확보를 확신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이 구체화된 것이다. 이 전투의 승리 덕분에 수세에서 공세로, 후퇴에서 반격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어 결국 한반도의 남쪽을 지켜낸 것이다.

◆다부동,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국군 1사단장으로 다부동 전투 승리의 주역인 백선엽 준장. 이 전투를 치르던 그는 어느날 지휘소를 나와 전투가 벌어지는 최전방으로 향했다. 고지에서 밀려 내려오던 수백명의 부하와 마주친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우리가 밀리면 미군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물러서면 너희가 나를 쏴라. 나를 믿고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 그리고 백 장군은 먼저 앞으로 달려갔고 부하들이 그 뒤를 따랐다. 고지는 다시 아군 손에 들어왔다. 후일 백 장군은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는 제목으로 회고록을 내기도 했다.

올해로 91세인 백 장군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로 다부동전투를 꼽았다. 낙동강을 방어해서 북진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게 그 이유다. "적 3개 사단이 우리를 완전히 포위했어요. 별명이 불독인 워커 장군이 전차와 대포를 갖춘 미군 27연대를 보내줬어. 거기서 6·25 전쟁 최초로 한·미 합동 군사작전을 벌인 거죠. 만일 그때 다부동이 뚫렸으면 한국은 북한 손에 떨어졌을 거요."

백 장군이 지휘한 제1사단 12연대 소속으로 낙동강 방어전에 참전한 80대의 노병 김태석 옹도 얼마 전 매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회고했다. "내 나라 내 강토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목숨 걸고 싸웠지. 낙동강을 내려다보면 새까맣게 몰려오던 인민군이 지금도 눈에 어른거려…." 낙동강이 훤하게 내려다 보이는 왜관읍 석전리 자고산(303고지) 전투에서 인민군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인 김 씨는 진지로 밀려드는 북한군을 향해 정신없이 소총을 쏘아대느라 왼쪽 다리에 총을 맞은지도 몰랐다. 다행히 총알이 관통하지 않고 뼈를 다치지 않아 부대원들을 독려하며 고지를 사수할 수 있었고 아픈 다리를 절며 평북 운산까지 북진했다.

다부동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경북 영양 출신으로 6·25전쟁을 종군한 조지훈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지훈은 다부동전투 직후인 1950년 9월 말 '다부원에서'란 시를 지었다. 격렬했던 다부동 전투의 참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 시는 1995년 시비로 만들어져 구국용사충혼비와 함께 다부동 전적 기념관에 세워졌다.

'다부원에서'

-조지훈

'한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多富院)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 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彼我) 공방의 포화가

한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國土)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風景)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軍馬)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뢰군 전사

일찌기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生靈)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運命)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安息)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者)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安住)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나라사랑 정신을 가르쳐주는 다부동

7일 낮 칠곡 다부동 전적기념관. 한파가 몰아치는 가운데 6·25에 참전했던 두 노병을 만났다.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칠곡군지회 이현시(80) 회장과 송종식(78) 사무국장. 19세의 나이로 자원 입대해 경주 안강과 포항 기계에서 전투를 한 후 함경북도 청진까지 북진했던 이 회장은 "다부동에서 국군과 미군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대한민국이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8월부터 9월 사이에 벌어진 다부동전투에서 국군과 미군이 이겨 대구를 지켜냈지요. 그 때 만약 다부동에서 우리가 졌다면 대구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대한민국도 지켜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철도공무원으로 일하다 수송자동차대대 병사로 6·25에 참전한 송 사무국장도 "다부동전투는 전쟁의 양상을 바꾼 중요한 전투였다"며 "국군 1시단을 비롯한 장병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고 지역 주민들도 힘을 보탠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아직도 전쟁 당시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두 노병은 60년이란 세월에 묻혀 장병들의 나라사랑 정신이 점점 퇴색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6·25에 대해 잘 몰라요. 노병들을 초청해 강연 행사도 열고 있지만 이보다는 교과서에 6·25에 대한 정확하고 체계적인 내용을 담아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다부동과 같은 전적기념관을 순례하며 나라사랑 정신을 깨닫게 하는 행사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두 노병은 "6·25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로 꼽히는 다부동전투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나라의 소중함"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다부동에서 나라사랑을 깨닫기를 바란다"고 말을 맺었다.

이대현 사회2부장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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