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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사] "외환위기 때 외평채 발행 성공 큰 보람" 김우석 예일회계법인 회장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어느 날 그의 책상 앞에 어사화(御賜花)가 걸렸다. 증조부가 과거에 급제한 뒤 하사받은 가보(家寶)였다. 하지만 까까머리 철부지는 화려한 종이꽃은 이미 떨어져 버리고 가느다란 대나무 가지만 남은 초라한 모습이 싫었다. 몰래 감춰버리곤 했지만 '아버지의 정성'은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책상 앞에 다시 있었다.

김우석(64) 예일회계법인 회장이 그런 선친의 뜻을 모를 리 없었다. 고교 시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건국대 무역학과 3학년 때는 제1회 공인회계사 시험(1967년)에 합격했다. 대학 졸업 후 장교로 군 복무를 하면서도 책을 놓지 않아 제대 직후인 1973년 행정고시 14회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시골이라 중학교와 고등학교 모두 남녀공학이었는데 마음이 끌리는 여학생이 있어도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한 범생이였습니다. 사회에 나와서도 크게 나서지 않아 구설에 오른 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명색이 회계사에다 재무부 이재과장 출신인데 이재(理財)에 어둡다고 놀림도 많이 받았죠."

재무부에서 잔뼈가 굵은 김 회장은 공직 재직 중 국제금융통으로 이름을 날렸다. 재무부 산업금융과장, 외환정책과장을 역임했으며 아시아개발은행, 주일 대사관, 청와대에서도 파견 근무를 했다. 미국 윌리엄스대학에서 경제학 석사를, 필리핀 산토토마스대학원에서 '한국의 금융 발전과 통화 수요'란 논문으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가장 보람 있었던 일로도 외환위기 때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으로서 40억달러의 외평채 발행을 성공적으로 처리했던 것을 꼽았다.

"당시 탤런트만큼 TV에 자주 출연해 정부 정책을 알렸지요. 1년 동안 하루도 쉰 날이 없을 정도로 고생은 했지만 위기를 잘 넘겨 다행이었습니다. 사상 최초의 외평채 발행 서류에 정부 대표로 서명할 때는 기쁘면서도 제가 빚을 지게 된 것 같은 느낌도 들었지요."

고시 동기 가운데 가장 먼저 국장에 승진할 정도로 승승장구했지만 정권 교체는 그에게도 시련이었다. 김대중 정부 초기인 2000년 한국은행 감사로 발령나면서 재정경제부를 떠나야 했던 것. "솔직히 억울한 심정도 있었지만 제가 낙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세상 사는 이치를 배웠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소위 힘 있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신용회복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을 때도 우리 사회에 보탬이 되려고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예전만 못하지만 그는 술 실력이 수준급이다. '모래밭에 물 붓기'라는 게 주변의 귀띔이다. 자산관리공사 사장 취임 직후에는 노조 대의원 수련회에서 5시간 동안 60여 명의 대의원들과 일일이 대작한 일화도 있다. 당연히 친화력이 돋보인다. 외유내강(外柔內剛)형이라는 평가도 많다.

"직원들에게 권한을 많이 위임하는 편입니다. 직원들이 책임감을 갖고 일을 처리할 수 있어야 조직도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업무는 치밀하게 챙기는 대신 평상시에는 상호 신뢰를 쌓기 위해 노력합니다. 재작년부터 몸담고 있는 예일회계법인도 작지만 강한 조직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리부엉이 서식지로, 오지(奧地) 영양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수비면 송하리 출신인 그는 지금은 문을 닫은 송하초교와 영양중·고를 나왔다. 김재수 농림수산식품부 제1차관이 초등학교 후배이고, 이재오 특임장관은 고교 2년 선배다.

"공직 생활을 돌이켜보면 무식하게 일만 했던 것 같습니다. 시골 출신에다 명문고, 명문대 출신이 아닌 만큼 일로 두각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지요. 제가 세 번이나 산 책이 '신념의 마력'인데 후배들도 '신념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지를 버리지 말기 바랍니다."

고향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다. 자산관리공사 사장 퇴직을 앞두고는 퇴직금 가운데 1천만원을 모교인 영양중·고 장학기금으로 기탁하기도 했다. 서울에 살면서도 매일신문의 대구경북 기사 하나하나를 꼼꼼히 챙겨본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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