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나라에서 공정성 담론이 한창이다. 하버드대 철학 교수인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이 여전히 독서계를 휩쓸고 있다고 한다. 지난여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 구현을 제안한 것과도 어우러지고 있다. 공정성은 한국의 발전 단계에서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바람직한 담론 주제임에 틀림없다.
60여 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에 한국인들은 엄청난 국가발전을 이루어냈다. 한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 산업화를 통해 '빵'의 크기를 키웠으며, 민주화를 통해 그것을 나누기 위한 절차를 만들어냈다. 이제 그 절차에 의해 결정해야 할 정책의 내용, 즉 '빵'의 배분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의 현대정치사에 천착했던 고(故) 김일영 교수는 194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의 한국 발전을 '건국'과 '부국'으로 압축해서 특성화한 바 있다. 이 표현 방식을 연장하여, 1990년대와 2000년대의 '민국'에 이어 이제 '정국'(正國)의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담론이 전개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염려스러운 것은 샌델이 설파하는 정의론의 핵심을 막상 한국 사회의 담론 과정에서는 비껴가고 있는 점이다. 샌델이 고심하는 것은 정의 기준이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로서 설정될 사안인가, 아니면 그 개인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이익, 즉 공동선의 본질에 관한 것인가의 문제이다. 미국에서는 본래 이 두 시각이 모두 중시되었으나, 지난 세기에 이르러 주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만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다만, 개개인이 처해 있는 기존의 여건은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기회균등 원리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현재 가장 불리한 여건에 처한 사람들에게 유리하도록 배분하는 원리를 따를 것인가를 둘러싼 보수와 진보 간의 논쟁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개개인이 자신에 대한 유'불리 여부를 판단하여 그 원리에 합의하게 되는 것으로 추론하는 방식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샌델은 이와 같은 자유주의의 시각에 대해 반론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권리로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만을 중시하는 일부 미국인들이 과거 흑인노예제가 존재하던 시대에 자신은 살지 않았으므로 지금 국가의 보상 정책에 대해 부담할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독일과 일본의 전후 세대들이 그들의 정부가 과거에 저지른 만행에 대해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 인식을 바탕으로 샌델이 공동체의 중요성과 공동선의 본질에 대해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요즘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공정성 담론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로운 선택으로서의 정의론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는 듯하다. 새해 초부터 여'야당 간에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는 '복지 논쟁'도 그 연장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다름없다.
한국이 산업화되고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의식에서나 실제에서나 크게 신장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앞으로도 지속되고 더욱 강화될 것이다. 미국의 예에서 본 것처럼, 이 과정은 서구 나라들이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통해 거쳐 온 발전의 단계이기도 하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한국은 서구 나라들의 발전 단계를 그 순서대로 차례차례 거쳐야만 하는 것인가의 문제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이 겪은 시행착오와 사회 갈등까지도 모두 그대로 답습해야 하는 일종의 국가발전단계의 결정론이라도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따른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한국에서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빠른 속도로 사회변동이 이루어졌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공정성 기준을 둘러싼 논쟁도 빠른 속도로 전개될 것이다. 미국에서 적어도 한 세기 동안 전성기를 누린 개인 중심의 담론에서 이제 다시금 공동체 복원을 강조하는 담론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우리는 불과 십수 년의 기간에 거쳐 나가게 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그 압축된 논쟁 과정에서 겪게 될 엄청난 사회 갈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날 압축 발전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가치 충돌과 그로 인한 상처들이 아직 채 아물지 않은 상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에 더해, 공동체의 중요성과 공동선의 본질을 중심으로 접근하는 정의론이 아울러 논의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용덕(서울대교수·행정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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