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천막천이면 어떠랴…가난했지만 놓을 수 없었던 붓

'영남화단 백년…열정의 기억'전, 29일까지 동원화랑

#미술이 돈이 된다는 것을 모르던 시절, 아니 오히려 가난의 표상이던 시절이 있었다. 1930년대 이후 전쟁을 거치며 화가의 삶은 피폐해졌지만 하루라도 붓을 놓을 수 없는 화가들은 군용 천막천 위에도, 은박지 위에도 그림을 그렸다. 화구통 뚜껑 위에 물강을 칠해 그린 그림은 오늘날 화가들에게 숙연함을 안겨준다.

동원화랑은 29일까지 '영남화단 백년, 그 순수와 열정의 기억'전을 연다. 김호룡, 황술조, 주경, 박명조, 배명학 등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모았다. 동원화랑 손동환 대표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이 시대를 '순수 시대'라고 칭했다. "당시 작품을 보면 경제 논리와는 전혀 무관하게 오로지 작품에 대한 열정만으로 그림을 그렸던 화가의 정신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면서 "이번 전시는 당시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작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유족과도 연락이 닿지 않아 평소 작품을 보기 힘든 작가들 위주로 선정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는 이인성, 손일봉, 주경, 변종하 등 익히 알려진 작가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작가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

김용조(1916~1944), 황술조(1904~1939)는 당시 천재적인 화가로 주목받았던 작가들이다. 이인성과 함께 그림 수업을 받았던 김용조는 한국 근대미술의 천재화가로 꼽히지만 가난에 허덕이다 28세라는 이른 나이에 요절한 작가다. 황술조 역시 35세로 요절한 작가라 남아있는 작품이 많지 않다. 이번 전시에 풍경과 정물 각 한 점씩과 드로잉 작품이 전시된다.

1950년대 그림 재료가 귀해 대작이 드물었던 시절, 보기 힘든 100호 사이즈의 대형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백락종(1920~2003)의 1956년 작 '군상'은 낙동강을 건너 장에 가던 나룻배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갓을 쓴 노인들은 담소를 나누고 엄마를 따라 장에 나선 아이는 엿을 사달라고 떼를 쓰고 있다. 배 한가운데는 엿 등 각종 잡화를 팔고 있는 소년이 서 있다. 뒤에서 피곤을 이기지 못한 아낙네가 엎드려 쪽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작가는 당시 풍경을 세련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김창락(1924~1989)의 '농경'도 100호 사이즈로 대작이다. 이 밖에도 김호룡, 소삼령 등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작품이 서너 점에 불과하고 특히 정경덕은 선전에 10회 가까이 입선했지만 미술사적으로 남은 작품은 1941년 입선작인 '풍경' 한 점뿐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이인성(1912~1950)의 작품도 눈에 띈다. 여백의 미를 강조한 그의 수채화 '빨래터'에는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선비의 모습과 아이를 업고 냇가를 지나는 여인, 빨래에 몰두하고 있는 여인들이 보인다. 다만 가장 중요한 배경인 물을 생략해 상상력을 자극한다.

미술평론가 김영동 씨는 "대구는 한국근대미술사의 중요한 인물들을 길러내고, 그 작가들의 역량과 작품들의 미술사적 의의는 한국근대미술사를 압축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독특한 곳"이라면서 "미술 문화의 풍부한 발원지였지만 그 역사와 전통을 제대로 이어오지 못한 게 우리의 현실"이라고 했다. 053)423-1300.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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