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수도사가 순례여행 중에 성인의 유해가 안치된 마을에 들른다. 거기서 그는 성인의 삶과 공덕, 기적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수도사는 지역사회를 위해, 다수의 안녕을 위해, 종교단체를 위해 성인의 유골을 훔치기로 작정한다. 한밤중에 무덤을 파헤치고 유골을 훔치는데 성공한다. 환희에 찬 신도들은 성인의 유골을 훔쳐온 수도사를 반긴다.'
오랜 전통을 지닌 중세 '거룩한 도둑질'의 전형적인 이야기다. 성인의 유골을 입수하기 위해 수도사는 무덤을 파헤쳤고, 장사꾼들은 교회를 약탈했고, 도굴꾼들은 로마의 카타콤을 뒤졌다. 탐내던 성(聖)유골을 입수하게 된 종교단체와 지역사회는 성유골 도둑질을 처벌하기는커녕 거룩한 행위로 간주해 환대했다.
지은이는 '요즘 기준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 환대와 도둑질'을 해명하기 위해 그런 행위를 하게 된 사회문화적 맥락을 고찰한다. 기독교 신자들은 성유골을 어떻게 인식했던 것일까, 도둑질은 어떻게 정당성을 확보했는가. 역사인류학적 관점에서 성유골 도둑질을 거론하는 이 책은 단순히 성유골 도둑질 이야기를 넘어 중세 민중기독교적 심성의 한 측면을 밝혀주고 있다.
성유골은 어째서 '지역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영적인 힘을 가진 것'으로 인식됐을까. 책은 '성유골 숭배는 순교자 숭배에서 비롯됐다. 순교자 숭배는 영웅숭배와 유사하지만, 순교자의 시신은 영웅의 시신과 다른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식됐다. 초기 기독교 신자들은 순교자들이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고, 최후의 날에 본래의 육체를 회복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신도들은 성인의 시신을 가까이하면 복을 받을 수 있으며 훗날 성인과 함께 부활할 것이라고 믿었다'고 밝힌다. 281쪽, 1만8천원.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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