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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박의 작명탐구] 이름을 남긴 역사속의 큰 인물(다산 정약용)

'한 우물만 파라'는 말이 있지만, 이것저것 못하는 게 없는 사람 앞에서는 그 말이 무색해진다. 한 분야에서 다른 사람의 찬사를 받을 만한 뛰어난 성과를 거두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여러 분야에서는 얼마나 어렵겠는가.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오늘날 천재로 불리는 이유는 그가 미술뿐만 아니라 수학, 물리학, 천문학, 의학, 지리학, 공학 등 여러 방면에서 후대에 큰 영향을 준 위대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천재가 비단 유럽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천재적인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서 경세유표(조선사회의 정치적인 모순을 극복하여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한 정책제안서), 목민심서(현 제도 내에서 공직을 바로잡아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려는 취지로 쓴 책) 등 일생 동안 5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였다. 또한 그는 정조의 명을 받아 수원 화성의 축조기간을 단축시킨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를 설계했다. 활차와 고륜 등을 써서 작은 힘으로 크고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수 있는 장비들을 발명하여 성의 축조 비용을 절약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을 강제동원하는 부역을 시키지 않고 임금을 지급하는 모군만으로 성을 건설하여 백성의 피해도 줄였다. 그는 사상연구와 과학, 행정 부문에서 큰 업적을 남긴 위인의 이름으로 우리 역사에 자랑스럽게 기록되어 있다.

정약용의 원래 아호는 다산이 아니었다. 일곱 살 때 천연두를 앓아 오른쪽 눈썹이 세 갈래로 나뉘어졌다 하여 스스로를 '삼미자'(三眉子)라고 불러, 자신의 신체적인 결함을 호로 사용하는 대인의 기질을 보였다. 다산이라는 호를 사용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의 나이 30대 후반부터일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1801년에 일어난 신유교난(辛酉敎難) 때이다. 이후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세 차례에 걸친 18년간의 유배생활 동안, 학문연구로 인하여 쇠약해지고 병든 몸을 호전시키기 위해 정약용은 차를 즐겨 마셨다. 심지어 생을 마감할 때도 찻종지가 곁에 있었다 하니, 다산이라는 아호만큼 그를 잘 말해주는 것은 없을 것 같다.

꽉 막힌 불의(不義)의 시대를 올바르게 살다간 천재 다산. 그는 1762년 6월 16일,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정약용(丁若鏞)이라는 관명을 가지게 되었다. 정약용의 위로는 약전, 약종, 그리고 누이가 있었다. 옛 작명방식을 보면 대개가 그러하듯 남자 형제들은 돌림자를 사용한 경우가 많다. 이들 형제들은 약(若)자를 돌림자로 사용하여 삼형제가 남다른 재능을 보인 삶을 살았다. 다산의 이름인 약용은 토(土)의 기운이 강한 이름으로 그에게는 재성(財星)으로 작용하며, 재성은 부지런하고 적극적이다. 또한 융통성이 뛰어나고 인간관계가 원만하다. 한마디로 절망하지 않는 성격의 이름이니 불의의 시대를 살았어도 이에 굴하지 않고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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