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눈길위의 라면 한 그릇

하얀 세상 너무나 아름다운 나머지 벅찬 감동이 밀려와…

도반들의 여행 계획은 아주 즉흥적이다. 기획하고 상의하는 과정은 생략한다. 점심을 먹다가도 "내일 새벽 됐나"하고 운을 떼면 "됐다"는 동조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면 바로 출발이다.

정오 뉴스에 "내일 아침 기온은 올 들어 가장 추운 영하 20℃"라는 아나운스먼트가 떨어지기 바쁘게 "새벽 기차를 타고 봉화 석포로 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여럿 중에서 두 사람만 출발키로 했다.

#눈길 여행에 등산장비 단단히 챙기고…

석포역에서 승부역으로 가는 눈길은 정확하게 12km이다. 재바르게 걸으면 네 시간 안에 다다를 수 있지만 빨리 걸어봐야 하행열차를 탈 때까지 남은 시간을 죽일 방법이 없다. 동대구역에서 새벽 6시 20분에 강릉행 열차를 타고 석포역에 내리면 오전 10시 17분. 8시간 동안 눈 속을 어정대고 있어야 오후 6시 16분 승부역에서 동대구역으로 가는 열차를 탈 수 있다. 도착은 밤 10시 8분.

눈길 삼십 리를 걷는 데는 채비가 단단해야 한다. 모자가 달린 다운파카는 물론이고 아이젠과 스틱, 모장갑과 선글라스 그리고 눈 위에 앉을 깔개까지도 필수다. 등산장비 함에서 오만 것들을 꺼내 륙색에 담고 있으니 아내가 "또 어딜 가요"한다. "눈길 삼십 리 행군"이라 했더니 구미가 동하는 모양이다. "나는 가면 안 돼요." "그러면 당신 것도 챙겨요." 일행이 세 사람으로 늘어났다.

달리는 새벽열차 속에서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을 생각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설국의 첫 문장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새어 나왔다.

#눈속의 나, 영화속의 주인공처럼 황홀

석포역에서 승부역으로 가는 강변 눈길은 영화 속 풍경처럼 정말 환상적이다. 바람은 맵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라이트블루의 하늘. 그 아래 도화 연필로 그린 듯한 눈 덮인 산들의 스카이라인. 하얀 강바닥에 뻥 뚫린 시커먼 얼음 숨구멍. 이렇게 아름다운 백색 향연에 손님으로 초대 받다니. 오! 하나님, 정말.

눈길은 생각보다 미끄럽지 않았다. 의사 지바고가 연인 라라를 찾아가던 시베리아 눈길이 환영처럼 눈에 어른대기 시작하자 이 눈길이 끝나는 지점에 내 목숨도 다하여 영원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방정맞은 생각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이 길은 온갖 동영상이 제멋대로 상영되는 '영화의 눈길'인가. 필름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 돌아갔다.

소나무 숲이 바람을 막아주는 양지녘에 털썩 주저앉았다. 술 한 잔 마시지 않고는 이 벅찬 감격, 하얀 세상에 은총과 같이 밀려오는 감동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잭 다니엘이란 위스키 한 컵을 스님들의 밥그릇인 발우에 따르고 코카콜라 한 캔을 부었다. "얼음이 없잖아." 젊은 여인의 속살과 같은 흰 눈 한 줌을 집어 흩뿌렸더니 멋진 버번 콕(bourbon coke)이 칵테일 되어 나왔다.

#아름다운 설경에 오직 감사할 따름

우린 걷다가 쉴 때마다 '눈 탄 눈 술'을 마셨다. 그러면서 이 멋진 경치 속에 우리를 풍경의 일부가 되게 해 준 어떤 큰 힘이 저 높은 곳에 있을 것 같아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두 시간을 걷고 나니 점심때가 훨씬 지나 있었다. 마침 길가 빈집 마당에 자리를 펴고 제대로 된 술상을 차렸다. 족발과 김치만 있어도 한상 가득한데 뜨거운 코펠이 가운데 정좌하고 나니 그야말로 술맛 나는 세상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출출한 뱃속에 라면 한 젓가락 후루룩 빨아 넣고 국물 한 술 떠먹고 나니 흰 눈이 도배한 하얀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슬람은 돼지고기를 금하고 라마단 기간 중엔 금식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돼지족발을 제상에 올려두고 앞산 위의 푸른 하늘을 향해 다시 한 번 감사의 예를 올렸다. 댕큐, 오 나의 하나님.(thank you, oh my god.)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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