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운명을 건 갈림길에 적구의 무리들이 영천뻘을 넘나드니 인과 철이 용융하는 전쟁터로 너, 나 뛰쳐 나가 북을 막아 내 고장을 지켰다. 저 기룡산은 이 금호강은 너의 용자를 길이 간직하리'(영천지구전적비 비문)
영천은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굳건히 이겨낸 영광스러운 호국의 현장을 곳곳에 간직하고 있다. 민족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 당시 영천전투는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 보루로서 총반격의 도화선이 됐으며, 나라의 운명을 되살린 전투로 기억되고 있다.
◆나라의 운명 되살린 영천전투
영천은 한국전쟁 당시 전략적 요충지였다. 영천은 대구에서 34㎞, 경주에서 28㎞ 거리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였다.
1950년 9월 다부동 방면 돌파에 실패한 북한군은 공격방향을 영천으로 바꿔 기습을 감행했다. 북한군 제2군단은 보현산 일대에 대한 국군의 방어태세가 다른 지역보다 약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포항 죽장-영천 축선상에 제15사단을 투입, 국군이 예측하지 못한 방향에서 공격했다. 보현산 지구를 방어하던 국군 제8사단의 주 저항선이 이미 무너져 영천은 위기에 빠졌다.
영천이 함락되면 대구-영천-포항을 연결하는 낙동강전선의 유일한 보급로가 차단되고 국군 제1, 2군단이 분리돼 낙동강 방어선 붕괴로 인접한 대구와 경주는 물론 부산마저 상실할 최대의 위기였다. 영천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UN군은 부득이 한국에서 철수할 계획도 세웠다.
9월 5일 북한군 약 2개 대대가 전차 3대를 앞세우고 자양-영천 도로를 따라 내려오며 인근 고지를 공격했으며 오후 북한군 제50연대, 56연대 병력이 언하동 일대까지 진출했다. 6일 새벽 북한군 제15사단은 영천읍을 점령한 뒤 남쪽 완산동에서 임포 사이에 주력부대를 배치했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국군 제2군단장 유재흥 장군은 제1사단 11연대와 제6사단 19연대를 제8사단에 배속해 영천 전체를 완전히 탈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날 오후 국군 제8사단 공병대대와 제3연대 1대대가 미군 전차소대와 함께 영천읍을 공격한 뒤 탈환했다.
8일 북한군 제15사단의 공격으로 영천읍이 다시 함락됐지만 한 시간도 안 돼 국군 제19연대 3대대가 재탈환했다. 국군 제2군단은 영천-경주 간 도로를 확보하고 영천 방면의 북한군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10일 새벽 반격작전을 개시했다. 제8사단은 배속된 제11연대, 제19연대를 포함한 5개 연대로 북한군 제15사단 주력부대가 전개한 완산동에서 대의동 일대를 남, 서, 북쪽에서 포위 공격해 3일 만에 섬멸하고 영천을 완전히 장악했다.
10여 일간의 혈전에서 국군은 최소의 희생(50명 전사)으로 북한군 3천800여 명을 사살하고 309명을 생포했으며 전차를 비롯한 각종 장비 2천500여 점을 노획했다.
◆미 "영천 뚫리면 한국 포기"
열악한 상황에서도 크게 이기는 전투를 대첩(大捷)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구려 살수대첩과 고려 귀주대첩,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행주·진주·한산도 등 3대 대첩 등은 적의 침입에 맞서 국운을 지켜낸 전투였다.
영천전투는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고 인천상륙작전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에 영천대첩으로도 불린다. 휴전 후 김일성은 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영천전투 실패가 패전의 요인이었다"고 보고할 만큼 전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영천전투 중 일시적으로 영천을 잃자 육군본부와 미8군사령부가 부산으로 이동한 것은 영천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또 미 합참은 인천상륙작전 재검토 의사를 거듭 타진하기도 했다. 기계, 안강에 이어 영천까지 잃게 되자 미 합참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맥아더 장군에게 인천상륙작전을 취소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보완하는 것으로 재검토할 것을 권유하는 의사를 타진한 것이다.
게다가 북한군에 의해 영천이 돌파될 위기에 처하자 미국은 한국을 한때 포기하겠다고 검토했다.
당시 미 합참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와 군대를 포함해 62만 명을 미국령 서사모아제도에 재배치해 신한국을 창설하겠다는 계획을 승인했다. 이 계획은 한국민들의 반발을 고려해 사전에 거론하지 않았다.
9월 7일 영천 방어가 가망이 없어졌을 때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정일권 총참모장에게 이 철수계획을 알려줬다. 정 총참모장은 영천을 탈환한다면 이 계획을 백지화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워커 장군은 "물론이다. 영천만 되찾는다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포항, 안강, 기계, 다부동, 왜관, 창녕, 마산 등 모두가 이곳 영천만 무사하다면 다 무사해진다"고 말할 만큼 영천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고향과 나라는 스스로 지켜야
"1950년 9월 우리들은 죽을 힘을 다해 영천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마침내 인민군 3천800여 명을 사살해 인천상륙작전의 물꼬를 터고 북진의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빛나는 전투 중 하나가 영천전투입니다."
이달 13일 오후 국립영천호국원. 이곳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을 추모하며 그분들의 희생과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현재는 추모뿐만 아니라 전후 세대의 호국 안보교육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정광용(81) 영천대첩참전전우회 영천지회장과 최용성(54) 육군3사관학교 교수가 영천대첩비를 바라보면서 영천전투에 대한 소감을 나누고 있었다. 이 비는 낙동강 방어선 최후의 보루인 영천을 지켜낸 영천전투를 기념하고 참전 장병들의 나라사랑을 이어받기 위해 지난 2002년 건립됐다. 한파로 쌀쌀한 날씨였지만 노병과 현역 군인은 영천전투 얘기로 추운 줄을 모르는 듯했다.
정 지회장은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19세의 나이로 자원 입대했다. 그는 영천에서 치열한 전투를 한 뒤 평안북도 희천과 맹산까지 진격했다고 한다.
정 지회장은 "당시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스스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애국심으로 영천사람 6명과 함께 입대했다"면서 "치열한 접전 끝에 영천을 여러 번 뺏기고 빼앗았지만 결코 내 고향과 내 조국을 잃을 수 없다는 심정으로 싸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최 교수는 육군3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1992년부터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6·25전쟁에 대한 저서를 저술하면서 영천전투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다.
최 교수는 "영천은 낙동강 방어전선의 최후 보루였다"면서 "영천전투의 승리로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작전의 계기가 만들어졌다"고 평가했다.
두 사람은 영천전투의 승리 요인에 대해 "병력과 화력 덕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천시민들이 자원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 지회장은 매년 9월 13일 영천호국원에서 6·25 참전용사와 현역 군인 및 국가유공자단체원 등이 모여 '영천대첩' 기념행사를 갖는다고 했다. 1950년 9월 13일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인민군 간 최대 격전 중 하나로 꼽히는 영천전투에서 국군이 확실한 승기를 잡은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정 지회장은 "참전용사 수백 명이 매년 이곳에 모이는 것은 당시의 호국정신을 후배들에게 알리고 싶기 때문"이라면서 "요즘 젊은 세대들은 선배들이 흘린 피의 가치를 알아달라"고 당부했다.
최 교수는 "영천전투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애국심으로 뭉쳤기 때문에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면서 "노병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젊은이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안보교육 등이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모현철기자 momo@msnet.co.kr
사진·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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