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같이 가는 풍경

'티켓'(Tickets, 2005)은 리얼리즘 영화 미학의 대표적인 세 명의 감독이 저마다의 색깔로 이어가는 옴니버스 영화다. 기차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서로 부대끼고 때로는 부딪치면서 어우러져가는 모습들을 어느 알바니아 난민 가족을 공동배경으로 그려가는 풍경화다. 차창 밖으로 무심히 흘러가는 원경으로, 무심코 혹은 불현듯 다가오는 근경으로 제각각 그려내지만, 세 편의 조각들을 짜깁기하였다는 흔적조차 미처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 울림만큼은 한결같이 길고도 은근하다.

에르마노 올미(이탈리아)의 첫 번째의 이야기는 혼자만의 꿈속에서 깨어나 조금씩 주변 풍경으로 눈을 떠가는 한 노신사를 따라간다. 감미로운 쇼팽의 전주곡을 따라 애틋한 추억과 뒤늦게 찾아온 사랑의 설렘에 취해 있다가 무심코 깨어난다. 살벌한 보안군인의 발길에 차여 알바니아 난민 아기의 우윳병이 엎질러지고, 그 하얀 얼룩이 번지면서 만들어내는 싸한 정경 앞에서 자꾸만 불편하다. 조용히 아기에게 건네는 우유 한 잔의 온기로, 비로소 혼자만의 꿈이 아닌 함께하는 풍경 속으로 편안히 어우러진다.

압바스 키에로스타미(이란)의 이야기는 매사 독선적이고 까탈을 부리는 미망인과 수행하는 봉사자 청년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위태로운 순간들을 따라간다. 누이의 친구와 우연한 만남 앞에서 청년은 자꾸만 쑥스럽고 계면쩍어진다.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함께하였던 모든 기억과 추억에서 혼자만이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그런 사실조차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무례하도록 무심했던 스스로 모습이. 이런저런 회한에 겨운 머리를 조아릴수록, 엉뚱하게도 독불장군의 안하무인의 지경은 마침내 목불인견의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고립무원의 외톨이로 노부인만 플랫폼에 남겨둔 채, 스스로와 상대방에 대한 부끄러움과 분노로 얼굴이 달아오른 청년만 실고서 기차는 무심하게 떠나버린다.

켄 로치(영국)의 마지막 이야기는 로마에서 열리는 축구경기를 보러 가기 위해 마음이 한껏 들떠 있다가 표를 잃어버리고 우왕좌왕하는 10대 영국 소년 세 명과 표를 훔치고서 전전긍긍하는 알바니아 소년 사이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소동의 현장이다. 질풍노도 시기의 주인공들답게 그들의 격정과 격론은 가히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린다. 소년들답게 결정도 거칠 것 없이 신속하고 단호하다. 생존의 절박함을 위하여 기꺼이 생활의 즐거움을 내어준 악동들의 영광의 탈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온정 어린 봄날과 냉정한 겨울, 그리고 열정의 풍경들이 차례로 지나간다. 영광스러운 하늘로 가는 천국행 티켓은 더불어 평화로운 지상의 역에서만 주어진단다. 외골수로 동쪽으로만 치닫다가 생뚱맞게 서방정토를 꿈꾸는 어리석음만은 범하지 말자. 막 출발한 2011호 열차에 거는 기대이자 다짐이다.

송광익 늘푸른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