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아내에게서 문자가 왔다. "여보 곰곰이 생각할수록 당신이 나의 남자라는 사실이 눈물겹도록 고마워. 사랑해. 내 곁에 있어줘서~."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급히 통화를 했더니 별일 있어서가 아니고 딸하고 대화하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단다. 가슴이 뭉클하여 딸에게로 회신을 했다. "엄마, 참, 참한 사람이다. 아빠에게 쪼끔 과분할 정도로! 동생과 네가 있어 아빠 엄마가 더 빛나!", 딸은 이렇게 문자를 보내왔다. "엄마 아빠는 진정 천생연분인가 봐요. 잘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항상 고맙고 사랑해요. 아빠가 있어서 늘 힘이 됩니다."
대학 2학년 때 한 여자가 내게 왔다. 그녀는 양말 두 켤레를 수줍게 건네주고 후다닥 사라졌다. 봉사단체의 회장이었던 나는 모임이 많을 때는 사나흘씩 외박을 하기 일쑤였다. 집 나와 있는 동안에는 옷은 물론 양말조차 갈아 신지 못하고 지내는 내가 같은 동기로서 안쓰럽게 보였나 보다 생각했다. 형제 많은 집에서 자라 사랑을 주고받는 것도, 자존감도 부족했는데, 그녀는 때로는 먼발치서, 때로는 가까이서 항상 나를 챙겨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어 놓았다. 군 생활 동안에는 수백 통의 편지로 힘을 주었고, 제대 후 여전히 철없이 행동했던 나와 군말 않고 가정을 일구었다. 입사 2년 만에 직장을 그만두고 뜻있는 일을 하며 살겠다는 통보(?)를 하면서 어느 날 밤에 한 자루 촛불과 맥주 한 잔으로 엉성한 분위기를 연출했을 때도 그녀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지지해 주었다. 전셋집을 십수 번 옮겨다닐 때는 "이사할 때마다 짐을 정리하는 것이 너무 행복해"라며 가장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 15년 동안 대구환경연합에서 박봉으로 상근할 때도, 4년 전 생면부지 군위에서 간디문화센터를 처음 시작할 때도 가장 먼저 응원해 주었다. 시민 운동한답시고 집안 살림은 나 몰라라 하는 무능한 사람인데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 이렇게 감동하고, 행복해하는 한 어리석은 여자가 우리 집에 산다.
내 나이 스물일곱 때 또 한 여자가 내게 왔다. 아비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무지 몰랐던 나는 꼬빡 하루 동안 제 어미를 힘들게 하다가 흡입기의 도움을 받아 세상에 나온 그녀와 첫 대면을 했다. 외조부모 손에서 자란 그녀는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이미 스스로 모든 것을 알아서 했다. 입학하고 졸업할 때 외에는 학교 다니러 간 일 없는 무심한 아비를 두었지만 초등학교 시절 내내 학교에서 주는 칭찬에서 빠지는 법이 없었다. 제천간디학교에 다닐 때는 학기 말에 교사 학생 모두의 무기명 비밀투표로 뽑는 간디인상을 5회 연속 수상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덕분에 그녀의 아비라는 이유만으로 주위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대상이 되었다. 철이 들면서는 제 어미의 '절친'이 되어 나그네 인생 아비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집중력, 자기 절제, 외국어 구사력, 발표력, 세계관 등 모든 면에서 딸은 이미 아비를 훨씬 능가했다. 지천명이 코앞인데도 제 앞가림하지 못해 허둥대며 사는 아비를 인생의 든든한 조력자로 고마워하는 한 착한 여자도 우리 집에 산다.
호스피스들이 임종 앞둔 환우들에게 '살아 온 날을 돌아볼 때 무엇을 가장 후회하느냐'고 물었더니 '옆에 있는 이에게 잘 해주지 못한 것이 제일 후회된다'고 했단다. 우리 집에 두 여자가 없었다면 나도 같은 후회를 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 자기만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독선과 오만에 빠져 옆에 있는 소중한 존재를 몰라보고, 오히려 무시하며 살았던 지난날이 부끄럽고 후회스럽다. 부부는 전생에 원수지간이라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하고, 부모자식은 전생에 자식에게 빚진 게 많아 아낌없이 갚으며 살라 했다. 그런데 한 여자는 전생에 나를 얼마나 못살게 굴었으면 아무리 퍼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사랑을 주는 아내가 되어 우리 집에 있고, 한 여자는 전생에 내게 빚진 것이 얼마나 많았으면, 거꾸로 아비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예쁜 딸로서 우리 집에 있다. 다음 생에 우리 집 두 여자와 만날 인연이 겁난다.
문창식(간디문화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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