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첫사랑

아마 그랬겠지요. 당신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은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거나, 아니면 이미 지워버린 기억이었기 때문이겠지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불쑥 걸려온 전화가 대학시절, 당신을 사랑했던 남자의 것이라면 어떤 말들이 필요했을까요. 해서 당신의 경계는 낯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냥 친구가 되었으면 해." 그 말이 헤어지자는 말로 들렸던 것은 섣부른 치기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젊은 날의 열정이 가지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고운 학사복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던 그날도 쏟아지는 최루탄에 맞서 싸우던 저는 우습게도 당신의 고운 모습이 눈물로 얼룩지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유난히 길었던 어느 겨울, 한 평 남짓한 독방의 격자무늬 창살이 만드는 손바닥만한 햇살 속에서 가끔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숨죽여 울기도 했지만 그 시간만은 늘 행복했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혁명을 꿈 꿀 수 없다"는 선배의 말을 위안 삼으며 말입니다.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지요. 스승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사랑했던 브람스를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브람스처럼 사랑하는 이를 영원히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과연 지킬 수 있었느냐고 반문하겠지요. 다른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또한 당신보다 더 사랑한 사람은 없었노라고 말하는 것 역시 거짓입니다. 변명처럼 몇 번의 사랑과 이별을 겪었습니다. 당신을 잃었던 아픔처럼 상처에 아파하고 괴로워했습니다. 하지만 그 치유의 시간이 점점 짧아진 것은 누군가를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한 것이 아니라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겠지요. 어쩌면 첫사랑이란 분명 사랑한 시간보다 사랑을 잊지 못한 시간이 더 많은 기억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처음이란 것은 쉽게 잊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행여 당신의 침묵이 저의 무례에 대한 항의였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무슨 미련이 있겠습니까? 단지 젊은 날, 당신이 던진 친구라는 말을 이제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시절, 섬광처럼 푸르게 빛나던 사랑이 여전히 의미 있는 것은 오늘 인연이라는 사랑을 알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히말라야 밤하늘에 부서져 내리던 별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처럼 이제야 사랑이란 것이 집착이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맞서 싸워 거친 바람이었던 날들, 당신과 저는 서로에게 장애였으나, 이젠 거칠 데 없는 바람으로 남을 수 있으니 서로를 원망하지 않겠지요. 첫사랑 당신, 부디 행복하길 빕니다.

전태흥((주)미래티엔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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