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다의 주인은 문학소녀들인 줄 알았다. 시, 소설, 수필을 즐겨 읽으며 시인이나 작가가 되기를 열망하는 젊은 여성들은 바다, 특히 겨울바다라고 하면 탄성을 지르며 자지러진다. 겨울바다에 무엇이 있기에 이렇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걸까.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문학을 위해, 아니 문학적 치기를 이기지 못해 겨울바다를 찾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겨울바다를 느끼기 전에 그런 치기 자체를 유치한 걸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춥고 바람 부는 그곳에 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사실 겨울바다는 황무지 다음으로 황량한 곳이다.
젊은 시절, 딱 한 번 혼자 겨울바다를 찾은 적이 있다. 문학소녀들처럼 감성에 이끌려 어쩔 줄 모르고 바다에 간 게 아니라 이성의 지시에 따라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 바닷가에 선 것이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헐한 땅을 좀 사서 비쌀 때 팔면 돈이 될 것 같아 요즘 청문회에 나와 곤욕을 치르는 고위공직자들과 같은 투기꾼 심보를 앞세워 그렇게 겨울바다에 간 것이다.
적금을 들다 해약한 돈 20만원으로 촌집 한 채 사려던 투기꾼의 눈에 문학은 보이지 않았다. 아는 이 하나 없는 겨울 바닷가에서 아무런 대책이 서질 않아 한 시간쯤 서성거리다가 찐맛없어 돌아서 버린 기억은 지금도 아련하다. 그때가 1970년대 초반으로 수원-강릉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박정희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와 축사를 하던 날이다.
당시 나의 속셈은 앞으로 우리나라는 거미줄 같은 고속도로로 연결될 것이며 다음 차례는 포항~강릉 간 고속도로가 우선일 순위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지금 헐값에 사둔 집값은 다락같이 오를 것만 같았다. 예상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시기를 예측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 무너진 사랑탑꼴이 되고 말았다.
겨울바다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너무 넘쳐 버렸다. 얘기를 제대로 해보자. 기차여행을 겸한 당일치기 바닷가 나들이 장소로는 기장이 적격이다. 기장은 해운대 옆 동네로 대변항과 맞은편 연화리가 물고 있는 겨울바다 풍경은 가히 일품이다. 동대구역에서 오전 9시 34분 열차를 타면 2시간 20분 만인 오전 11시 55분 기장역에 도착한다. 돌아오는 열차는 오후 4시 1분.
이곳은 기장역 구내에 홍매가 피는 3월 하순과 아무 볼 것 없는 겨울바다를 보러 떠나면 풍경은 덤이다. 백수인 나는 올해 네 번이나 그곳을 다녀왔다. 기장에서 맛볼 수 있는 별미 음식은 대변항의 멸치 회, 공수마을의 짚불 곰장어, 연화리의 눈꽃송이 장어 회가 있다. 멸치 회와 짚불 곰장어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눈꽃송이 회는 비교적 생소한 음식이다.
연화리 맨 끝집인 정성장식당(051-721-2417)이 우리 팀의 단골집이다. 눈꽃송이 회는 바닷장어를 잘게 썰어 물기와 기름을 쫙 빼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흰 눈송이처럼 생긴 회가 대나무 소쿠리에 담겨 나온다. 파도가 하얀 포말을 날리는 날 먹으면 제격이다. 회에 곁들여 나오는 기본 반찬 또한 요리 수준이다. 이곳 바다 밑 돌바닥에서 잡힌 돌낙지와 손톱 크기의 게 볶음 그리고 무진장 리필되는 기장미역 등이 메인 디시인 눈꽃송이 회를 깔볼 때도 있다. 회는 1kg에 7만원, 일여덟 사람이 실컷 먹을 수 있다.
이곳의 고무 다라이 포장집도 명물이다. 순이와 옥이네(010-4170-3007)포장에 앉아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한 접시에 1만원짜리 해삼과 뿔소라를 안주로 소주 한잔을 걸치면 백수들의 풍류치곤 조금 과하다. 그리고 광장에서 해풍에 말리고 있는 가자미. 서대, 우럭 등을 싼값에 살 수 있는 것도 이곳 연화리의 매력이다.
기장에 드나들고부터는 겨울바다를 모른다고 딱 잡아뗄 수가 없다. 방파제 끝에 초병처럼 서 있는 등대, 외항으로 빠져나가는 통통배들의 모터 소리, 끼룩대는 갈매기의 울음소리, 바위에 붙어 있는 푸른 이끼 등 어느 것 하나 겨울바다를 멋지게 채색하는 소품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뒤늦게 철든 겨울바다를 좋아하는 문학 노년이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탄핵 반대, 대통령을 지키자"…거리 정치 나선 2030세대 눈길
민주, '尹 40% 지지율' 여론조사 결과에 "고발 추진"
젊은 보수들, 왜 광장으로 나섰나…전문가 분석은?
윤 대통령 지지율 40%에 "자유민주주의자의 염원" JK 김동욱 발언
尹 탄핵 집회 참석한 이원종 "그만 내려와라, 징그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