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출향인사] 이동흡 헌법재판소 재판관

깐깐함으로 명성…후배들엔 '벙커 판사'로 통해

"요즘 젊은 판사들을 보면 재판의 영향력에 대해 고민이 부족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판사는 억울한 사정을 찾아내서 진실을 밝힐 의무가 있습니다. 40년 가까이 봉직하면서 원수가 된 사람이 없는 것 하나만으로도 저는 축복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동흡(60)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법조계에서 '벙커 판사'로 잘 알려져 있다. '벙커'는 일을 너무 깐깐하게 챙기는 바람에 후배 배석판사들이 힘들어하는 부장판사를 일컫는 은어(隱語)다. 골프에서 벙커에 빠지면 쉽게 탈출하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 절로 떠올려진다. 이 재판관은 그러나 '자신이 벙커라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벙커'라는 게 법조계 인사들의 귀띔이다. 그만큼 열심히 일하고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노력한다는 뜻이다.

"헌재 재판관에 취임한 뒤에는 '흡(洽)사마'란 별명이 새로 생겼더군요. 학교 선생님처럼 연구관들이 내는 보고서에서 잘못된 부분을 일일이 고쳤더니만 개성 강하면서도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른답니다."

이달 21일 '세계로 나아가는 한국의 헌법재판'이란 저서를 낸 것도 그가 일에 푹 빠진 '벙커'임을 증명한다. 재직 중 책을 낸 재판관은 그가 처음이다. 460여 쪽 분량의 책에는 그가 2006년 9월 재판관에 취임한 뒤 미국·독일·프랑스·중국·일본 등 각국의 최고 재판기관과 교류한 경험을 담았다. "내부 참고용으로 썼던 글들을 묶었습니다. 제목은 22년의 길지 않은 역사에도 성공적으로 정착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우리 헌재를 세계에 소개하는 의미입니다. 로스쿨 학생과 젊은 법조인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이 헌법 재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그는 우리 법조계에서 국제 교류에 앞장서고 있는 대표적 인물로도 꼽히고 있다. 내년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아 헌법재판소연합' 창립준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이번에 펴낸 책에도 국제회의·외국 대학 초청강연에서 발표했던 원고의 영어·중국어·일본어 원문을 실을 정도로 외국어 실력이 탁월하다. "일본어는 20년 이상 공부해 왔고, 영어는 미국 유학 경험 덕분에 자신이 있는데 중국어는 아직 부족합니다. 10년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 시절부터 중국어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언어뿐 아니라 문화도 함께 배울 수 있어 아주 재미가 있습니다."

이 재판관은 보수적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현직 헌재 재판관 가운데 합헌 의견을 가장 많이 냈기 때문일 것이다. '미네르바' 박대성 씨 사건과 관련해 지난 연말 위헌 결정이 난 전기통신기본법 헌법소원 사건, 헌법 불합치로 결정된 이광재 강원도지사의 직무정지 헌법소원 사건 등에서도 합헌 의견을 냈다. 헌재는 9명의 재판관 가운데 6명이 위헌 의견을 내야 법 효력이 정지되는 위헌 결정을 내린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보수적이라는 평가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다. "헌재가 신뢰를 얻으려면 위헌 선언을 하는데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봅니다. 20여 년 동안 법률이 많이 정비돼 앞으로는 위헌 결정이 크게 늘지않겠지만 합헌적 해석을 통해 국회가 제정한 법률의 효력을 유지하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헌재 결정이 포퓰리즘에 빠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실제로 그는 합헌 결정이 난 간통죄에 대해서는 위헌 의견을 냈다.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사생활의 비밀·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앞서 서울고법 부장판사 시절에는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고(故) 신효순·심미선 양 가족이 검찰을 상대로 낸 정보공개청구소송 항소심에서 검찰이 보유한 대부분의 미군 수사기록을 공개하라고 판결, 진보단체들의 환영을 받기도 했다. 공정거래와 지적재산권·조세 분야에 남다른 식견을 갖춰 공정거래위원회의 결정을 파기하는 결정을 유달리 많이 선고한 일도 유명하다.

27일로 예순 번째 생일을 맞은 그는 박일환 대법관과 함께 사법부 내 대구경북 출신 최고 맏형이다. 청도 태생으로 대구초교·능인중·경북고·서울대 법대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 조지타운대에선 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3년 사시 15회에 합격한 뒤 대구지법 부장판사·헌재 헌법연구부장·사법연수원 교수·서울고법 수석부장판사·서울가정법원장·수원지법원장을 역임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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