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금'(誠金)의 사전적 의미는 '정성으로 내는 돈'이라고 돼 있다.
너무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사람들은 '성금'이라는 단어와 함께 가장 먼저 '불우이웃돕기'를 떠올렸다. '기부' 'ARS 모금' 등의 단어도 함께 따라왔다. 사람들의 개념 속에 '성금'이란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십시일반 내는 돈"쯤으로 인식돼 있었다. 대부분의 성금이 불우이웃을 돕는 목적에 사용되기 때문인데다가 요즘은 전화 ARS를 통한 소액기부가 활성화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성금'의 의미가 변색되고 있다. 별의별 용도에 '성금 모금'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군 장병의 발열조끼 구입 예산까지도 성금으로 마련하는 세상이다. 왜 이렇게 성금에 의존하는 사회가 됐을까?
◆발열조끼 모금방송, 정말 최선입니까?
KBS 1TV는 이달 14일부터 15일까지, 19일부터 21일까지 닷새간에 걸쳐 '대한민국 국군, 우리가 응원합니다'라는 ARS 성금 모금을 진행했다. 14일과 21일 오전 10시부터 정오까지는 특별 생방송도 편성됐다. KBS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국군장병들의 자긍심과 사기를 진작하고 국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유도하기 위한 국군장병 격려 성금 모금 방송 '대한민국 국군, 우리가 응원합니다'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생방송에서 KBS는 "북한의 도발에 강력 응징해야 한다"며 최전방 부대에서 고생하고 있는 군장병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함께 발열조끼 생산공장을 보여줬다. 그리고 각 지역 총국까지 연결해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이 앞다퉈 성금을 내는 장면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심지어 개그맨들은 "21일을 '발열조끼의 날'로 정하자"고 외쳤다. 이를 통해 KBS는 모두 23억7천여만원의 성금을 모금했다.
이런 KBS의 난데없는 성금 모금에 여론은 뜨겁게 들끓어 올랐다. 발열조끼가 필요하다면 당연히 세금(국방예산)으로 충당해야 할 일인데 왜 별도로 모금하느냐는 지적이다.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 게시판에는 "어이없는 KBS 성금 모금" "이 참에 총도 성금으로 새걸로 사주고, 대포도 배도 많이 낡았다던데 성금 걷어서 사주자"는 등의 격앙된 반응이 올라왔다.
한 남성은 "우리 군인은 아침마다 웃통을 벗고 한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기상구보를 할 정도로 정신무장이 잘 되어있다"며 "그런데 왜 발열조끼가 없어 군생활에 애로가 있는 것처럼 여론을 조성하느냐"고 지적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고생하는 군인들에게 발열조끼를 사주는 게 문제가 아니다"며 "국민 쌈짓돈 모아다가 국가가 할 일을 국민들에게 떠넘기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모든 시민들이 KBS의 모금 행사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아들을 군에 보냈다는 한 네티즌은 "부모 입장에서 KBS의 모금행사에 찬성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무상급식 주장하면서 '밥 한끼 먹이자는데…'라는 주장을 하곤 하던데 그렇다면 '혹독한 겨울 발열조끼 하나 입히자는데…' 왜 그리 반대를 많이 하나요?"라면서 "우리 군인을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ARS를 눌렀다"고 반박했다.
◆31조 국방 예산에 20억원이 부족?
KBS의 모금 방송에 대해 내부에서도 논란이 뜨겁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공정방송추진위원회는 19일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뜬금없을 뿐 아니라 '국군의 날'도 아니고 연말도 지났는데 웬 모금방송이냐는 것"이라며 "더구나 구제역 창궐로 전국의 축산농가와 일선 공무원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 상황에서 왜 방위성금 모금 방송인가"라고 내외부의 반응을 소개했다. 또 이들은 "정부 예산으로 해야 하는 일을 왜 공영방송사가 앞장서 서민들의 호주머니 돈을 털어 대신하려고 하는가"라며 "방위성금 모금방송은 공영방송사가 할 짓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논란이 번지자 국방부는 같은 날 'KBS 발열조끼 성금 모금'에 대한 공식 입장을 표명했다. 국방부 입장에서도 모양새가 당당하지 못하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국방부 대변인실 정책홍보담당관은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에 "일부 네티즌들께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국방예산으로 이를 추진하지 못하고, 국민성금이라는 형식으로 추진하게 된 점은 저희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지난해 발생한 천안함 사태 및 연평도 도발로 인해 전력증강 분야에 예산이 우선 지원될 수밖에 없는 제한된 국방예산 상황을 고려하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시민들이 지적하고, 또 의아해하고 있듯이 우리나라 방위 예산이 결코 적지 않다는 점이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2009년 기준으로 한국의 국방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2.9%에 달하며 세계 12위를 차지한다. 더구나 올해 국방예산은 지난해보다 6.2% 늘어난 31조4천31억원이 편성됐다. 지난해 3월 천안함 사태와 11월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말미암아 국방예산 증액과 무기 현대화에 대한 요구가 빗발친 탓이다. 한 정치인은 "31조가 넘는 예산에서 0.006%에 불과한 고작 20억원의 발열조끼 지급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성금 모금 특별 생방송까지 마련한다는 것은 거의 코미디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성금 모금, 한국의 끈끈한 정이 낳은 문화?
사실 이런 기부금 모금 논란은 지난 천안함 사태 때도 있었다. 국가를 위해 순직한 장병들에 대한 위로금은 응당 국가가 지급해야 할 부분인데 왜 이를 시민들의 성금으로 충당하느냐는 지적이었다. 엄청난 신체·정신적 충격을 입은 장병들에게 당연히 충분한 보상과 위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국민 누구를 막론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었지만, "국가적 차원의 공식적인 보상이 아닌 시민 성금으로 지불하는 방식이 오히려 이들의 숭고한 희생의 가치를 손상시킬 수도 있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제기됐던 것이다.
국민적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성금 모금이 진행되다 보니 정작 모금된 성금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총 400억원 정도의 국민 성금이 모인 지난 천안함 사태 때는 250억원이 사망 군인과 금양호 선원 등의 위로금으로 집행됐고, 나머지 150억원가량은 천안함 재단 설립 기금으로 만들어져 유족 자녀 장학사업, 추모사업 등에 사용됐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천안함 성금 특별위원회(기부자, 유족, 시민공익단체 등으로 구성)에서 논의한 결과다.
하지만 82억여원이 모금된 연평도 피격 사건과 관련한 성금은 아직까지 어떻게 지원을 해야 할지 모금단체와 주민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당장의 생계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주민들은 직접 배분을 가장 원하고 있고 관할 지자체인 옹진군 역시 이를 원하고 있는 반면, 모금단체들은 성금을 연평도 피해 복구에 사용하는 방안을 배제하고 있는 것. 모금단체들은 포격으로 파괴된 주택, 창고 등의 피해는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가 책임져야 할 사안인 만큼 성금과는 무관하다고 선을 긋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성금 모금을 한국 사회의 끈끈한 '정'이 낳은 문화로 보는 시각도 있다. IMF 외환위기 직후 금모으기 운동을 통해 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극복했던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사례. 여기에 연말 불우이웃돕기 성금 모금을 비롯해서, 1999년 실업이 극에 달했을 때는 실직자를 돕기 위한 성금 모금 특별 생방송이 편성되기도 했고, 태풍이나 집중호우로 인해 심각한 수해가 발생하거나, 심지어 북한 용천 폭발사고나 아이티 대지진 등 다른 나라가 사고나 천재지변을 겪을 때도 어김없이 모금 방송이 마련됐다.
하지만 이런 문화가 굳어지다 보니 걸핏하면 시민들에게 손을 벌린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심지어 최근 오세훈 서울 시장은 한강 예술섬을 시민 기부금으로 짓겠다는 생각을 밝혀 비판을 받기도 했다.
더구나 상당수 시민들은 "빈곤과 실업, 반복되는 수해 등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면 이를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근본적인 처방 없이 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땜질식으로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충당하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박진우(38·대구시 달서구 본동) 씨는 "발열조끼 예산이 필요하다면 국회에서 충분히 의논해 예산을 편성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 것이고, 연평도 사태에 대해서는 특별 예산을 집행해서라도 국가가 충분한 지원을 해야 한다"며 "늘 감성에 호소하는 방식을 통해 그때그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익숙해지다 보니 별것을 다 성금으로 모금하는 세상이 됐다. 다음번에는 무슨 '타이틀'로 모금에 나설지 걱정스럽다"고 혀를 찼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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