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무뚝뚝한 경상도 할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배어났다. "멀쩡한 소를 갇다 묻어야 한다는데 얼매나 속이 상한지…. 내가 차라리 날 잡아가라고 막았는데도 안 된다면서 기어코 끌고가는기라요."
요즘 사람들은 소를 식육용 '가축'으로 대할 뿐이다. 꽉 틀어막힌 닭장 같은 곳에 가둬 공장식으로 사육하고, 몸집이 크면 지체없이 팔아 도축하며, 병이 발생하면 전염을 막기 위해 생목숨을 그대로 파묻어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농촌에서 소는 집안의 가장 큰 재산이자 식구였고, 든든한 일동무였으며, 자가용이었다. 애지중지하던 자식과도 같은 소를 떠나보낸 할아버지는 연신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소 없이 우예 살까 싶어요. 그런 소가 다시 없는기라."
◆자식을 떠나보낸 것 같은 아픔
방문을 열고 마당을 내다보지만 늘 있던 그 자리에 소는 없었다. 소가 살았던 축사는 텅 빈채 멍에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늘 걸고 다니던 달구지 역시 마당 입구에 주인을 잃은 채 버려져 있었다. "내가 자다가도 소 꿈을 꾸는 기라. 갸가 들에가서 일하고 있을 것 같고, 일어나서 나가면 지금도 달구지를 끌어줄 것 같아요."
여든이 넘은 노부부와 20여 년 동안 애틋한 정을 나눠 '안동판 워낭소리'로 언론에 알려진 '학가산 와룡이'는 지난해 11월 말 세상을 떠났다. 안동에 구제역이 처음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인근 지역인 와룡면의 한 한우 농장에서 구제역이 발생하면서 반경 500m 이내 가축에 대한 매몰처리가 시작되자 와룡이도 '살처분 매몰' 대상에 올랐기 때문이다.
정봉원(86)·강남순(81) 씨 부부가 애지중지 20년을 키워온 '와룡이'는 세상을 떠나던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들일을 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서 짚단을 가져다 집에 내려놓기를 세 차례. 하지만 힘겹게 달구지를 끌고 돌아온 와룡이 앞에는 살처분을 위해 나온 공무원들이 버티고 있었다.
청천벽력이었다. 소가 병이라도 걸렸으면 그나마 수긍이라도 할 법 했지만 검사 한 번 없었다. 공무원들은 "동네에서 구제역이 발생했으니 소를 묻어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동네 주민들이 와서 할아버지를 만류했다.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한 할아버지가 잠시 돌아선 사이 와룡이는 공무원들에게 끌려갔다. 주사를 놓아 숨이 끊어진 와룡이는 동네 다른 소들과 함께 트럭에 실렸고, 저 건너 들에 묻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 그러고 나서 가보지도 못했어. 맴이 아파 생각하기도 싫어요."
◆생구(生口)라 불렸던 가족
농사를 짓던 우리 민족과 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산업화를 거치면서 각종 농기계가 그 자리를 대신할 때까지만 해도 소는 집안의 장정 몫을 해 내는 가장 큰일꾼이었으며, '가족'으로 대우 받았다. 옛사람들은 소를 '생구'(生口)라고 불렀다. 핏줄은 아니지만 한 집에서 밥을 먹고 사는 노비나 종을 그렇게 불렀는데, 동물로서 유일하게 생구 대접을 받았던 것이 바로 소였다.
시골에서는 재산목록 1호이기도 했다. 귀하디 귀하게 길렀지만 재산 중 가장 값어치 나가는 것이다보니 대도시로 유학간 자식의 등록금 마련을 위해서는 눈물을 머금고 내다 파는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상아탑'으로 불리던 대학을 '우골탑'(牛骨塔, 소팔아 대학에 보낸다는 뜻)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제는 세상이 변해 소가 식육용 '가축'으로밖에 대접을 받지 못하는 시절이지만 정 씨 할아버지에게 있어서만큼은 '와룡이'는 식구였다. 어디를 가든 늘 함께 했다. 할아버지는 와룡이에 대한 애틋함을 "그런 소가 있니껴? 별거 다했어예."라는 짧은 말을 연신 되뇌었다.
와룡이는 쟁기질로 밭을 갈고, 거름을 실어 나르는 등 할아버지네 온갖 궂은 농사일을 책임지는 것은 물론이고 동네 일까지 거드는 큰일꾼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소 좀 빌리주소' 하면 하루씩 빌리 주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대신 우리집 하루 품앗이 일을 해주는 기라. 소가 이 집 사람 역할로 품앗이를 한 게지요."
할아버지, 할머니의 전용 자가용 노릇도 톡톡히 했다.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다리를 다쳐 거동이 편치 않는 할아버지를 어디든 데려다 주는 것도 바로 와룡이였다. "이래가라면 이래가고, 저래가라면 저래가고. 면 소재지에서 집까지는 내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찾아왔어요. 얼매나 순한지 길섶에 매 놓으면 하루 종일 꿈쩍도 않고 앉아있더랬어요."
이런 와룡이가 끄는 달구지를 동네 사람들이 가끔 얻어타기도 해서 동네 '마을 버스' 역할을 하기도 했단다. "버스 탈라만 돈 내야 잖아요. 야는 돈도 안 드는기라. 얼매나 좋았다꼬요."
◆트럭, 자가용, 경운기 노릇까지
할아버지와 와룡이와의 인연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주 장까지 가서 수 많은 소 중에 와룡이를 골랐다. "일소로 쓸만한 녀석이 두 마리가 있었는데 한 마리는 사람을 보고 너무 풀쩍 뛰어서 안 되겠다 싶은기라요. 그래가 돈이 비싸도 큰 소를 사야겠다 싶어 야를 600만원을 주고 사왔지. 인물도 잘생겼었어. 그때 돈으로 600만원이면 지금 1천만원도 넘는 큰 돈이라요."
소는 대략 일 년에 한 번씩 새끼를 낳는다. 보통 소 사육 농가들은 이렇게 송아지를 받아서 다시 팔아 돈을 번다. 하지만 와룡이는 새끼를 낳는 데는 별 소질이 없었나보다. 20년을 할아버지와 사는 동안 송아지는 딱 한 마리를 낳은 것이 전부였다고 했다.
20년 세월을 함께 하는 동안 큰 병치레 한 번 없었다. 보통 시골에서는 소가 아프면 혓바닥에 된장을 발라주거나 침을 놓기도 하고, 소금으로 코를 비벼주기도 한다. 하지만 정 씨 할아버지는 "얼매나 튼튼한지 아픈적도 없었고, 먹성이 그렇게 좋았다"며 "들일을 하고 힘이 들어도 산에서 베어온 풀을 배불리 먹여주면 좋아했다"고 이야기했다.
옛날 산짐승들이 들끓던 시절에는 주인을 지켜주는 '호위무사'의 역할까지도 담당했던 소. 멧돼지, 노루, 너구리, 늑대 등 산짐승들과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큰 덩치로 주인을 막아서는 것이 바로 소였다. "보통은 산짐승들이 소를 보고 비키서지. 그래도 안 가마 몸으로 이래 이래 밀어내는기라. 주인 지키줄라고 안 그카나."
이렇게 충성스런 와룡이가 한 번은 개울에 처박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든 적도 있었다. 풀을 뜯어 먹으러다 뒤에 매고 있던 달구지와 함께 도랑으로 떨어진 것이다. 옆으로 드러누운 와룡이를 보고 할아버지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몇 시간을 일어나질 못하고 그대로인기라. 이대로 소가 죽으만 우짤까 싶어가 동네 사람들을 막 불러왔자나요. 장정 예닐곱이 들러붙어 겨우 일으켰는데, 고마 제발로 우뚝 서는기라. 아이고, 인자 살았구나 싶은 생각에 얼매나 좋든지…."
◆전국에 메아리치는 슬픈 워낭소리
사실 와룡이는 할아버지가 처음 키운 소가 아니다. 앞서 여러 마리의 소가 할아버지 손을 거쳐갔다. 소를 사서 키우다 되팔기를 여러 번 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 함께 하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 소는 와룡이뿐이다. 소는 수명이 15년 정도로 짧은 편이지만 와룡이가 할아버지와 함께 한 세월은 20년이 넘는다. 사람으로 따지면 100세가 넘은 노인에 해당하는 셈인 것. 그래서 할아버지의 상실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인자 갸 없으마 내야 마실이라도 댕길수나 있는교. 죽는 날까지 방구들이나 지키고 앉아 있는 수밖에 없지요. 인자는 수천만원을 줘도 일소를 못구한다카이."
소가 배합사료를 먹고 항생제 주사를 맞으며 살만 찌우다가 도살장에서 생을 마감하는 식육용 신세가 되면서 들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쟁기질을 하는 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소를 옛 방식 그대로 기르고 부리는 마지막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더구나 이제는 전국에 구제역이 창궐하면서 산목숨이 차가운 땅 속에 매장당하는 신세가 됐다. 전국적으로 3천400여 농가 14만5천여 마리의 소가 구제역 바이러스에 감염됐거나, 그 인근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구제역은 잡힐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전국에 구슬픈 워낭소리만 메아리치고 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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