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시안과 진시황릉에서 경험했던 감동이 채 가시기 전에 우리는 란저우(蘭州)에 도착했다. 간쑤성(甘肅省)의 성도인 이곳은 기원전 6세기에 진(秦)나라에 병합되면서 중화문화권에 들게 되었다. 이때부터 역사의 굴곡을 겪은 이 도시에서 병령사로 가는 물길의 출발지인 유가협(劉家峽) 댐까지는 누런 먼지 일색인 산과 골짜기의 연속이었다. 온통 흙먼지를 덮어쓰고 있는 민가가 군데군데 보이는 가운데 붉은 벽돌로 야트막하게 지어진 학교 건물과 산등성이에 보이는 도교 사원이 스쳐 지나가, 해동(海東) 범부(凡夫)의 머리로는 소화하기 힘든 풍광들이었다.
이런 길을 몇 시간 달려 유가협 댐에 다다른다. 댐은 황하삼협에 건설된 것인데, 147m 높이에 길이는 213m나 된다고 했다. 삼협이란 유가협, 염고협, 병령협(炳靈峽) 세 협곡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삼협의 물을 댐에 가두어 인공호수를 만들었는데 자그마치 길이 65km, 평균 너비 4.5km, 저수량 57억㎥라고 했다. 댐의 규모는 병령사 석불들의 수몰을 우려해 설계되었다고 한다. 쾌속 모터보트로 삼십 분 남짓 달리자 백년하청(百年河淸) 황하의 황토물이 이윽고 맑아지고 병령사가 가까워졌다. 호수 양안에 인적 없이 솟은 기암절벽과는 달리, 산자락에는 나무와 풀도 자라고 가축과 인가도 보였다. 가도 가도 물과 산뿐일 것 같던 이곳에도 사람이 사는 마을은 있게 마련이고, 이러한 곳에 또한 전설이 없을 리 없다.
어느 옛날 네팔 왕자의 꿈에 고승이 현현하였다. "산꼭대기가 붉은 흙으로 덮여 있고, 황하가 역류하는 곳에 가서 부처님의 길을 열어라." 이에 왕자가 병령사 계곡 어느 동굴에 들어 면벽 구도를 했다. 마을의 한 처녀가 매일 밭일을 나간 아비의 식사를 나르다가, 동굴 속의 왕자가 하도 보기에 딱해 아비의 식사를 나누어 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정분이 트기 시작했으나 하늘은 이들의 파계무참(破戒無慙)을 용서하지 않았다. 천둥소리와 함께 산을 무너뜨려 두 사람을 그 자리에 파묻어 버렸다. 이 애틋한 사랑 이야기의 뒤를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다. 효도와 구도보다 사랑을 택한 그들의 후일담이 궁금하다면 아직 세속과 육정(肉情)을 벗어나긴 글러 버린 사람일 터.
병령협 나루터에 도착한 우리는 벌어진 눈과 입을 한동안 다물 수가 없었다. 병령사 계곡 양쪽에는 석굴이 가득했고, 한곳에는 보수를 하는지 높게 비계가 쳐져 있었다. 건너편 산봉우리와 능선은 산수화나 무협지 속에나 나올 법한 경치여서 무시범부(無始凡夫)들이 발붙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問余何事棲碧山(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笑而不答心自閑(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別有天地非人間(별천지일세 인간 세상 아니네)-이태백(李白), '산중문답'(山中問答).
병령사 석굴이라면 보통 간쑤성 소적석산(小積石山)에 산재한 석불, 불화 그리고 점토 불상들에 대한 총칭이다. 병령(炳靈)은 '천불' '만불'이라는 의미의 티베트어 '빙링'의 음차(音借)이다. 결국 여기에는 불상들이 많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어느 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서진(西秦)의 건홍(建弘) 원년인 420년부터 청조에 이르는 약 1천500년 동안에 시나브로 개착되었으니 인간의 신심은 참말로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 지금은 석불 694기와 소상(塑像) 82기, 많은 벽화가 183개의 석굴과 불감(佛龕)에 모셔져 있다.
서안에서 서역을 오가는 실크로드의 상인들은 돈을 벌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뒤로 하고 생사를 일전일도케 하는 열사의 사구(砂丘)를 건넜을 것이다. 그들은 눈을 가리고 길을 잃게 하는 모래 바람을 맞고, 살을 에는 추운 밤이면 창천에서 쏟아지는 별들 속에서 처자의 얼굴마저 떨어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이 기댈 곳이라고는 부처님을 향한 기구 외에 무엇이 있었으랴! 그들이나 그네들을 인솔하는 객주들이 힘겹게 번 돈을 불전에 희사했고, 장인으로 하여금 불감을 파고, 불상을 굴마다 모시게 했을 것이다. 역시 시련이 엄혹할수록 신심은 깊어지는 법, 그 신앙이 예술로 승화되고, 성속(聖俗)이 모두 고통과 고난 아닌 성취가 없음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석굴 일주를 거의 끝낼 무렵 한 라마승을 만났다. 약 1천600년 전 이곳에 세워졌다는 티베트 사찰의 수도승인데, 희한하게도 한국어를 띄엄띄엄 하고 있었다. 국내의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다고 했다. 얼굴이 맑고 갈등이 없는 표정과 거만하지 않으며 거치적거림이 느껴지지 않는 몸가짐이었다. 두 번 다시 볼 것 같지 않은 나그네가 외람되이 물었다. "법랍이 얼마나 되시는지요?" "…." 석굴이나 감실의 어느 부처님처럼 수도승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글:박종한 대구가톨릭의대 교수 사진:박순국 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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