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전통에 '사천'(事天)과 '사친'(事親) 사상이 있다. 사천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고, 사친은 어버이를 섬기는 행위이다. 가정은 하늘이 맺어 준 혈연 공동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도 여기서 연유된 것이 아닐까.
서로를 위하며 오순도순 모여 살았던 대가족 시대가 참 아름다운 전설처럼 느껴진다. 요즘 같은 핵가족에서는 조그마한 틈만 벌어져도 곧 부모가 이혼하고, 자녀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연로하신 조부모 손에 맡겨지는 현실이다. 가족 안에서의 사랑, 서로를 섬긴다는 단어를 찾아보기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게 되었다. 자식이 어버이를, 어버이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현대에 들어서면서 갈수록 그 농도가 엷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민족 최대의 명절 설이 며칠 남지 않았다. 금년 설은 목요일이라 대부분의 직장은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연휴겠지만 "일부 기업체는 이르면 1월 29일부터 휴가에 들어가 2월 6일까지 최장 9일간이 된다."고도 한다. 하지만 올 설은 구제역과 조류인플루엔자(AI)가 전국으로 확산됨으로써 이상(異常) 명절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타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도, 고향에 계신 부모들도 구제역 등의 확산을 막기 위해 귀향을 자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르면 1월 29일부터'에서 '이르면'과 '빠르면' 중 어느 표현이 적확한지 망설여질 때가 있을 것이다. '빠르다'는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나 기간이 짧다, 어떤 것이 기준이나 비교 대상보다 시간 순서상 앞선 상태에 있다 라는 뜻으로 상대말은 '느리다'이다. '이르다'는 어떤 정도나 범위에 미치다, 대중이나 기준을 잡은 때보다 앞서거나 빠르다라는 뜻으로 상대말은 '늦다'이다.
'빠르다'는 움직이는 속도가 보통 정도보다 큰 것이고 '이르다'는 어떤 시각이 정해진 시각보다 앞선 상태에 있는 것을 나타낸다. 즉 '빠르다'는 절대적인 운동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고, '이르다'는 어느 정도 상대적인 순서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말의 개념을 생각하면 혼동하는 일이 적을 것이다. "민주당의 사퇴 압박을 받아온 정동기 감사원장 내정자가 이르면 1월 11일 자진 사퇴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행동이 빠르고 민첩하다."로 쓰인다.
새해 첫 달 마지막 날,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이 문득 생각난다. 20년여 동안 한곳에서 이 일을 하면서 사람과 일에서 적잖은 인연을 맺었다. 일(事)은 처음 몇 년간 벗어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에 다다른 끊지 못한 인연이지만, 이달 이 기간을 거의 함께 보낸 지기(知己)와의 인연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세상 모든 것을 섭리하는 신(神)의 뜻을 한낱 인간이 어찌 거슬러 갈 수 있겠는가.
성병휘<교정부장 sbh12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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