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설레는 명절

어릴 적 설날은 기다림이었다. 섣달그믐날 밤 집안 구석구석 밝혀두던 불빛 같은 따스한 추억이다. 잠이 들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말을 믿고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리곤 했다. 내가 준비하지 않아도 맛난 것 먹고 세뱃돈 받아 모여 노는 것이 좋기만 해서다.

신혼시절, 쌀을 한 말씩 불려 가래떡을 빼곤 했다. 전을 부치고 나물 장만을 거들다 보면 해는 어느덧 넘어가 깜깜해왔다. 떡가래가 꾸둑꾸둑하면 모두가 둘러앉아 썰었다. 초보인 내 손엔 물집이 생기기 일쑤였다. 코흘리개 친척은 댕기로 머리를 묶어달라며 치맛자락을 끌어 그 자리를 벗어나게 했다. 이젠 그도 건장한 청년이 될 만큼 세월이 흘렀다. 제관의 수도 한때 쉰 명이 넘었는데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결혼으로, 해외로, 공부하러 또 어른 몇 분은 저세상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어느 날, 어머님이 기제사에 대해서 의견을 내셨다. "조부와 조모를 합쳐서 모시면 어떨까?" 시류에 따라 사정에 맞춰 지내야 그 정신만이라도 영속되리라. 음식도 부탁해 마련하자고 하신다. 변한 환경에 조상님들이 적응하실까 염려는 되지만 바쁜 후손들을 이해해 주시리라.

제삿날만 되면 제수 준비에 내내 신경이 쓰여 안절부절못하곤 했는데 훨씬 마음이 가벼워졌다. 숙모님들도 한결 시간 여유가 생긴 듯했다. 퇴근 후 바쁘게 음식 준비하느라 눈 한번 찬찬히 맞출 새도 없었던 날을 떠올리며 세월이 점점 좋아진단다. 대신에 마음으로는 더 정성을 다해 조상님을 모셔야 하리라.

이번 설에도 음식을 형편에 따라 조금씩만 하기로 했다. 다 모여서 차례음식 장만을 해야 하는 부담이 덜어진 만큼 홀가분한 명절을 기대하다가도 어느 지인이 보내준 글귀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명절 때 쫄쫄 굶은 조상귀신 셋이 모여 신세 한탄을 하는 얘기다. 첫째 조상귀신님, 설날 제사음식 먹으러 후손 집에 가보니 차 밀린다고 자기들 편한 시간에 모여 벌써 차례를 지내버려 굶었단다. 둘째 조상귀신님, 후손 집에 가보니 집이 텅 비어 있더란다. 알고 보니 해외여행 가 그곳에서 차례를 지내버렸다고 해서 굶게 되었단다. 세 번째 조상귀신님 말씀하시길 "난 말이야. 아예 후손 집에 가지도 않았어. 후손들이 인터넷인가 뭔가로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나도 힘들게 그 집에 갈 필요 없이 편하게 근처 PC방으로 가면 된다더군. 인터넷으로라도 차례상을 받으려고 했더니 먼저 회원가입을 해야 한다잖아. 귀신이 어떻게 회원가입을 하나? 그래서 그냥 왔지."

조상님 배려 덕분으로 그동안 못 만난 일가친척의 얼굴도 차근히 보고, 살아 있는 오늘이 진정 행복임도 느끼며 덕담도 주고받을 수 있는 즐거운 명절이 되면 좋겠다. 꼬까옷. 새 신발을 기다리며 눈비비던 그 설렘으로.

정명희 / 대구의료원 소아청소년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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