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묵호항 갈매기

파도의 사랑기술이 굿판을 벌이고…

우리나라 바다를 통털어 동해가 가장 바다답다. 동해의 기상은 마도로스가 연상될 정도로 사나이답다. 그건 오입쟁이를 닮은 파도라는 에너지 탓이다. 파도는 "어머, 나 죽네"하고 무너지는 여인네를 인정사정 보지 않고 계속 밀어붙이는 열정의 힘이다.

어느 수필가는 "뭍의 발기가 결연한 의지로 바다 깊이 삽입되어 있는 곳이 곶(串)이다. 곶이 만을 감싸고 포구는 남편 잘 만난 아낙네처럼 얌전하게 만의 품에 안겨 비 맞고 몸부림치는 곶 끝의 으르렁거림에도 불구하고 혼곤하게 잠들어 있다"고 쓴 적이 있다. 그는 뭍에서 돌출한 곶을 남성으로, 곶이 삽입된 바다를 여성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곶의 안쪽인 만(灣)안에 숨어 있는 포구도 파도라는 남성을 받아들이는 여성으로 인식했다.

만의 품에 안겨있는 포구는 잠을 자면서도 푸른 바다의 꿈을 꿀 수 있는 것은 모두 파도의 덕이다. 후려치고 뒤집는 등 거친 기운을 다정함으로 표현할 줄 아는 파도의 사랑기술이 한마당 굿판을 벌이고 지나간 다음에는 이렇게 아낙을 혼곤한 잠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포구의 연인인 파도도 때론 원망의 대상이 될 때가 있다. 그것은 마누라 무서워 집에선 쓰지 못하고 우체국 한쪽 구석에서 연애편지를 써서 띄우는 시인에 의해서 저질러진다. '푸른 말'이란 아호를 가진 시인은 죄 없는 파도를 향해 시비조의 푸닥거리 한판을 벌인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 시인의 '그리움'이란 시다. 시인이 아무리 떼쓰며 엉겨 붙어도 파도는 말이 없다. 혼잣말로 "네가 저질러 놓고 왜 나더러 야단이야"하고는 "나 죽네" 작업을 계속한다.

묵호 어시장서 허기진 미각 채우다

위의 단상은 묵호에서 관광열차를 타고 강릉으로 가다가 푸른 파도를 보고 느낀 생각을 적은 것이다. 여행은 이렇게 좋은 것이다. 도반들과 함께 새벽 6시 20분 동대구 발 강릉행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묵호에서 내렸다.

묵호 어시장은 서해의 대천, 남해의 여수와 더불어 어종도 다양할 뿐 아니라 다른 곳에 비해 자연산 생선도 많고 값도 그렇게 비싸지 않다. 그래서 설악산을 다녀오거나 강릉, 속초에 걸음할 일이 있으면 이곳에 들러 허기진 미각을 채운다.

묵호 어시장에는 그동안 몇 번 들렀는지 일일이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정말 좋은 횟감을 만나 즐긴 인연은 떠나버린 연인처럼 잊으려 눈을 감아도 더 생생하게 떠오른다. 연전에 강릉에서 내려오는 길에 묵호 어시장에 들렀더니 마침 파장이다. 횟감 중에서도 가장 비싼 이시가리(줄가자미) 네 마리를 5만원에 샀던 횡재는 두고두고 이야깃거리로 남아 있다.

이번에는 22호 동해수산(주인 이상보'011-375-4947)에서 감성돔과 우럭 각 한 마리씩을 제법 솔깃한 가격에 샀더니 오징어와 도다리 몇 마리를 덤으로 얹어 주었다.

어시장 옆 공동화장실 옆 잔디밭에 고기상자로 술상을 차리고 추위 탓에 풀죽어 있는 국화 한 송이로 한껏 멋을 부려 보았다. 세 사람이 독한 위스키 한 병을 맥주에 섞어 마셨더니 목구멍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톡 튀어나와 바다 쪽으로 날아갔다. 갈매기야, 갈매기야, 부우산 가알매기야.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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