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의 혼] 제1부-나라사랑 5)포화 속으로

71명의 학도용사들 11시간 사투…北 주력군 온몸으로 막아냈다

포항시 북구 용흥동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뒷산에 있는 전적비 앞에서 학도의용군회 포항지회 김두석 부회장이 당시 전투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포항시 북구 용흥동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뒷산에 있는 전적비 앞에서 학도의용군회 포항지회 김두석 부회장이 당시 전투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에 마련된 참전 학도의용군 사진 앞에서 학도의용군회 포항지회 최기영(오른쪽) 회장과 김두석 부회장이 자신들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에 마련된 참전 학도의용군 사진 앞에서 학도의용군회 포항지회 최기영(오른쪽) 회장과 김두석 부회장이 자신들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학도의용군들의 활약상을 기리기 위해 현재 포항여고 정문 앞에 세워져 있는 전적비.
학도의용군들의 활약상을 기리기 위해 현재 포항여고 정문 앞에 세워져 있는 전적비.
영화
영화 '포화 속으로' 포스터.

우리가 전혀 예상 못했던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북한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무장한 채 남한 곳곳을 유린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남한은 연합군의 도착을 기다리며 낙동강 사수에 모든 것을 내걸고 전력을 총집결시킨다.

그 본산 중의 하나가 바로 포항. 포항을 지키던 강석대(김승우)의 부대도 낙동강을 사수하기 위해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렇다고 전선의 최전방이 되어버린 포항을 비워둘 수는 없는 일. 강석대는 어쩔 수 없이 총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71명의 학도병을 그곳에 남겨두고 떠난다. 유일하게 전투에 따라가 본 적이 있다는 이유로 장범(T.O.P)이 중대장으로 임명되지만, 소년원에 끌려가는 대신 전쟁터에 자원한 갑조(권상우) 무리는 대놓고 장범을 무시한다. 총알 한 발씩 쏴보는 것으로 사격 훈련을 마친 71명의 소년들은 피란민도 군인도 모두 떠난 텅 빈 포항여고 교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 채 석대의 부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영덕을 초토화시킨 북한군 진격대장 박무랑(차승원)이 이끄는 인민군 유격대 766부대는 낙동강으로 향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비밀리에 포항으로 방향을 튼다. 영덕에서 포항을 거쳐 최단 시간 내에 최후의 목적지인 부산을 함락시키겠다는 전략. 박무랑 부대는 삽시간에 포항에 입성하고, 사단사령부가 남아있던 포항여고 교정에 남아 있던 71명의 소년들은 한밤중 암흑 속을 뚫고 들려오는 소리에 잠을 깬다. 고요함이 감돌던 포항에는 거대한 전운이 덮쳐 오고….

이재한 감독이 만든 전쟁드라마 '포화 속으로'의 줄거리이다. 이 영화의 소재가 된 학도의용군의 주무대가 포항이다. 71명의 학도의용군들은 적의 주력부대를 맞아 사력을 다해 싸웠다.

군인으로 받아 본 훈련이라곤 총 한두 방씩 쏴본 게 전부인 이들. 북한군 12사단이 시내로 진입하자 국군 3사단은 작전상 형산강 남쪽으로 후퇴를 결정했다. 하지만 물러서는 부대가 달려드는 부대를 피해 제대로 정비를 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여유가 없었다. 적은 빠르게 진격해 오는데….

이때 학도의용군이 나섰다. 젊은 학도병 71명은 교복을 입은 채로 M1소총과 실탄 250발씩을 들고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이들은 11시간 반 동안 북한군을 막아냈다. 이로 인해 북한군의 주침공전선이 2시간 동안 지연됐다. 이 덕분에 20만여 명의 피란민들이 무사히 대피했고 3사단 주력부대도 형산강 너머에서 반격 채비를 갖출 수 있었다.

군번도 계급도 없었던 이들이었지만 내 한 몸 불살라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텼다. 총알이 떨어지면 육탄전을 전개했다. 얕보고 들어온 적이 사생결단으로 달려드는 학도의용군들에게 밀려나기 몇 차례. 하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은 이런 때 적절한 단어인가. 11시간이 넘은 전투로 학도병 가운데 48명이 전사한 채 물러서고 말았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희생된 학도의용군은 1천394명. 학도의용군은 군번도 계급도 없었기에 전투 때는 식량 배급마저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학도의용군회 포항지회 최기영 회장(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대표)은 "어떤 때는 전사자들의 식량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고 회고했다.

포항은 학도의용군이 전국에서 가장 많이 희생된 격전지. 이에 따라 이곳 출신 생존 학도의용군들은 1979년 용흥동 탑산에 터를 잡고 전적물 보존, 추념행사를 갖다가 각계에 건의해 2002년 기념관을 건립했다. 이곳은 학도의용군을 기리는 전국 유일의 기념관이다.

현재 생존해 있는 학도의용군들은 국가의 권유나 강제에 의해 입대했던 학도병, 소년병들과 달리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원입대한 자신들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국난을 당했을 때 전국 곳곳에서 봉기, 관군 활동을 지원하거나 대신하던 의병들로 생각한다. 최기영 회장은 "나이 어린 청소년들로 구성돼 임전무퇴의 기상으로 삼국통일의 초석이 된 신라 화랑도의 정신이 현대에 구현된 것"이라며 "호국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한데 후배들이 제대로 평가를 해주지 않는 것 같다"고 서운한 속내를 내비쳤다.

학도의용군회 김두석 부회장은 "죽을 때까지 북한군 퇴치의 주역이었던 학도의용군의 활약상을 전파하는 데 힘을 쏟겠다'고 다짐했다.

최정암기자 jeongam@msnet.co.kr

전몰학도의용병에

월탄 박종화

붉은 마귀들 평화로운 이 강산을 침범했을 때 적의 진흙 발길은

삼천리 골골마다 짓밟아놨을 때 씩씩하고 어린 학도 의용대

정기의 불타는 학도의용대.

부르지도 않았건만 모여들었네. 져야할 의무도 없건만 뭉쳐 모여들었

네. 모두다 스물안팎 명모호치의 이나라의 준총들

백수로 적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네

장렬하게 피를 뿜어 싸워 죽었네

군인 아닌 학도의 몸으로 옥이되어 부서져 버렸네

찬란하다 이나라 소년의 의기

서릿빛 무지개 되어 이땅 청산마다 길이 꽂혔네

아 아 그대들 아내도 없고 아들도 없네

그대들의 정기는 우리겨레 모두가 이어 받들리

삼천만 온겨레가 가슴 속에 고이 이어 받들리

그대들 편안히 눈을 감으라

그대들의 의기는 우리 겨레의 이름과 함께 천추만대에 태양같이 빛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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