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열강의 등쌀에 청나라 말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아편전쟁에 이어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당시 여러 한족계 민병단을 이끌고 군벌세력을 형성했던 이홍장(李鴻章)은 스승 증국번과 함께 난을 평정했다. 1823년 오늘 태어난 이홍장은 이때의 공으로 조정에 등용됐고 증국번 사후 한족계를 대표하는 북양대신이 돼 군권을 손에 쥐었다.
이후 그는 정치체제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군사'과학 분야에 서구화를 추진하는 이른바 '양무운동'을 펼치면서 만주족 지배층과 조정의 실권자 서태후의 강력한 후원을 등에 업었다.
하지만 그의 양무운동이라는 것이 군사력의 근대화를 통한 기존세력의 재무장 및 봉건체제의 유지만이 주 목적으로 한 한계와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조정 내 발언권이 크게 쇠퇴했다. 이후 그의 휘하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던 장교들은 청나라 멸망 후 각종 군벌을 형성, 장제스에게 토벌되기까지 중국 북방을 장악했다. 만년에 이홍장은 외교관 역할을 하며 일본과 서구 열강과의 평화정착에 노력하다 1901년에 사망했다.
무릇 위기의 시기에 전체 민중의 뜻과 배치되는 기득권층의 자기 이익을 위한 개혁 혹은 변혁은 한계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임을 이홍장은 몰랐던 걸까.
우문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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