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이라는 '먹을 것'의 문제는 생존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우리 인류뿐 아니라, 생명을 가지고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문제이다. 생명의 유지와 종의 번식이라는 생물의 본능도, '먹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먹이가 없는 '존재'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식량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 욕구라 할 수 있다.
우리네가 걸어온 굴곡 많은 삶 가운데 '보릿고개'라는 험난했던 고비가 있었다. 지금 70세가 넘은 사람들에게는 떠올리기조차 싫은 추억일 테지만, 그때 그 시절의 슬픈 이야기를 옮겨 적는다.
-보리쌀도 시절이 좋을 때나 먹는 게지, 보릿고개엔 칡하고 콩비지로 멀겋게 죽을 쑤어서 먹었습니더. 그것도 양이 모자라니 어쩌것소. 큰 양푼에 시어른 드릴 거 하고, 영감 것 퍼 놓고, 내 걸랑은 쪼만한 그릇에 담습니더. 그라문 우리 영감이사 '내 이걸 어찌 다 먹나……' 하면서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들이켰다 아입니꺼.
-그때는 집 밖에 나가보면 부황증이 들어서 퉁퉁 부은 사람들 천지였습니더. 사람이 나물하고 된장만 먹으니 부황이 안 들겄습니꺼. 지금이야 나라에서 구호 대상자로 밀가루도 주니 그런 사람이 적지만, 그 시절엔 보릿고개만 되면 모두 난리였습니더. 지금의 개밥 같은 것도 없어서 못 먹었습니더.
-살림이 괜찮아서 평소에 잡곡밥이라도 먹고 살던 집에서는, 보릿고개에 절량을 위해 밥 먹는 횟수를 줄이거나 이따금 죽을 먹는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지요. 그러나 하루를 밥 한 끼, 죽 한 끼로 때우던 집에서는 두 끼 모두 죽을 먹어야 했고, 점심으로 자주 먹던 감자도 떨어져 점심을 건너뛰어야 했습니다. 서너 사람이 먹을 정도의 밥을 할 수 있는 곡식이면, 열댓 명이 먹을 수 있는 죽을 끓일 수 있었기 때문에 밥보다 죽을 더 자주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의 경제개발정책 입안자들이 가장 희구하던 물자가 쌀과 석유였다. '쌀과 석유만 자급되면 우리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텐데' 하며 입버릇처럼 말했다. 사실 이 두 가지 물자의 부족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암적 존재였고, 그렇기때문에 쌀의 자급과 석유의 생산은 국민의 숙원이었다.
1964년 3월 13일 전국 식량증산 연찬대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식량의 자급 달성을 위하여 '전례 없이 강렬한 결심 하에 범국민적인 일대 증산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유시를 하였다. 그 같은 유시를 계기로 농업인들은 만난을 극복하고서라도 녹색혁명의 꿈과 식량증산을 반드시 이룩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1972년 12월 22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한 특별지시를 내렸다. 식량의 증산과 소비절약을 효율적으로 추진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듬해에는 '식량의 자급자족은 농업정책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공업입국이나 국가안보적 차원에서도 기필코 달성해야 할 국가적 문제'라고 강조하였다. 그에 따라 식량증산과 다양한 소비절약 시책이 추진되었으며, '통일벼'라는 신품종의 개발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농민들에게 'IR 667'이라는 낯선 이름의 벼 신품종은 신기하게만 들렸다. 그 품종은 인도형 벼의 피가 섞인 새로운 형질의 벼인데, 낟알은 안남미(安南米)처럼 길지만 엄청나게 소출이 많다는 점이 농민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품종을 선뜻 재배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자 농촌진흥청에서는 청장 이하 전 지도사들이 통일벼의 장점과 단점, 그리고 재배상의 특이점을 농민들에게 교육하고 권장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2년도에는 '통일벼'의 저온(低溫) 피해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 같은 실패를 교훈 삼아 1973년에는 한 농가도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교육과 기술 지도를 한층 강화하였다. 지도자들의 눈물겨운 노력 끝에 재배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통일벼는 '기적의 볍씨'라는 환호성이 터졌다.
그 뒤 밥맛이 좋으면서 다수확성인 신품종이 속속 개발되었다. 1977년에는 쌀 생산 4천만 석을 돌파하였고, 세계 쌀 생산 역사상 최고 기록을 수립하게 되었다. 되돌아보면 그 과정은 길고도 험난한 역정이었다. 1965년 벼 신품종의 연구와 개발에 착수한 뒤, 1977년 쌀의 자급기반을 마련하기까지 12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그리하여 어렵게만 생각했던 '녹색혁명의 꿈'은 이루어졌고, 1978년 5월 10일 농촌진흥청 경내에 '녹색혁명 성취의 탑'을 세웠다. 그 탑의 '綠色革命成就'라는 큰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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