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성환의 세상보기] 민주주의, 복지 그리고 포퓰리즘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복지 논쟁이 치열하다. 복지는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라는 주장과 무분별한 복지는 사회 발전을 해친다는 반대론이 팽팽하다. 특히 반대론자들은 아르헨티나의 예를 자주 들먹인다. 아르헨티나는 2차대전 중 중립국으로 연합국과 추축국에 소고기와 농산물을 수출해 막대한 외화를 축적, 유수의 부국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극심한 빈부 격차와 1인당 소득 약 8천500달러의 농업국에 머물러 있다.

아르헨티나의 침체는 1946년 대통령이 된 페론의 노동자 우대 정책과 그의 부인 에바 페론(애칭 에비타)의 빈곤층에 대한 과도한 지원 때문이었다고 한다. 영화 '에비타'와 주제곡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는 빈곤하게 성장한 그녀의 이야기이다. 페론은 9년간 권좌에 있다가 쿠데타로 실각했으나, 그의 정치적 유산은 오늘까지 남아있다. 그의 이념과 정책을 페론주의, 현재 집권당인 정의당을 페론당이라 부른다. 아르헨티나 빈민들은 에비타를 성자(聖者)로 추앙하고 있다. 반면에 부유층은 페론주의를 포퓰리즘, 페론과 에비타를 아르헨티나 침체의 장본인이라 비난한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침체는 페론시대의 복지 정책보다는 공업화의 실패, 부패와 빈번한 쿠데타 등이 더 큰 원인이다.

또 반대론자들은 현재 일본 민주당의 아동 수당, 고교 무상 교육 등을 재정 적자의 주범으로 꼽는다. 세출의 4분의 1을 국채 이자로 지출하는 일본의 재정 상태는 심각하나, 이는 1990년대 이후 자민당의 경기 부양책과 소득세, 법인세의 감세가 주된 원인이다. 잃어버린 20년이라는 끝없는 장기 불황도 빈약한 복지로 인한 저출산과 소비 감소 때문이라 한다.

한국에서는 아르헨티나의 경우와 일본 민주당의 복지 확대를 포퓰리즘이라 비판한다. 이때 포퓰리즘은 다수의 민중이 자기의 이익만을 좇는 중우(衆愚) 정치의 의미로 사용된다. 쟁점을 단순화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는 데 급급하고, 진정한 정치적 해결을 회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중은 올바른 판단능력이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 의해 선출된 정치인과, 또 대중의 선거로 성립되는 민주주의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의문이 생긴다.

포퓰리즘은 1850년에서 1880년대에 걸쳐 제정러시아에서 지식인에 대항하는 운동으로 등장했다. 미국에서는 19세기 말 공화당과 민주당의 부패 정치에 반대하여 출현한 인민당(People's Party) 지지자를 포퓰리스트라 불렀다. 인민당의 출현에 위기를 느낀 민주당과 공화당은 그 이후 보다 대중 친화적인 정당이 되었다. 포퓰리즘이 대중과 괴리된 정치를 변화시킨 것이다. 이처럼 포퓰리즘은 대중을 기반으로 엘리트주의와 기득권층에 대항하는 성격이 있다. 케임브리지 사전은 포퓰리즘을 "보통 사람의 요구와 바람을 대변하려는 정치사상,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민주주의는 소수를 존중해야 하지만, 결국은 다수를 '정의'로 하는 정치 제도이다. 선거가 바로 그것이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를 의식하지 않는 정치는 없다. 여기에서 포퓰리즘과 민주주의는 큰 차이가 없게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포퓰리즘은 자연스런 현상의 하나이며, 이를 부정하는 것은 민주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는 독재적 발상이다. 최근 복지를 둘러싼 정치 논쟁은 민주주의는 좋지만 포퓰리즘은 안 된다는 식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을 선거용 포퓰리즘이라 비난하면서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주민투표를 실시하려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과도한 복지는 생산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러나 잘 갖춰진 사회 안전망은 사회 안정과 경제 활력을 높이는 측면이 있다. 스웨덴, 핀란드와 같은 복지 선진국의 예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즉 복지가 국가의 몰락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미혼모와 빈민층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의 대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낙오자로 취급할 것인가는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철학의 문제이며, 복지가 안고 있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이를 풀기 위해서는 포퓰리즘에 대한 논란을 접고, 복지의 방법과 범위를 논쟁해야 한다. 복지는 당위(當爲)이며 동시에 정도(程度)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이해 당사자인 이 논쟁은 치열할수록 좋다.

이성환(계명대학교 교수·일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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